[비즈니스포스트] 3월 주주총회 시즌이 다가오면서 국내 주식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의 역할을 놓고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

통상적으로 국민연금은 회사가 내놓은 주총 안건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올해는 주총을 앞두고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 등 주주가치 제고를 요구하는 기류가 선명해지면서 국민연금의 존재감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기업 밸류업' 바람 부는 주총 시즌, 국민연금 거수기 벗어나 큰 목소리 내나

▲ 국민연금이 상장기업 주주총회에서 행사할 의결권의 향방에 시장의 관심이 쏠린다.


7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3월 둘째 주에 31개 기업을 시작으로 국내 12월 결산 상장법인 2614곳의 정기 주주총회가 이어진다.

특히 3월 넷째 주에는 정기 주주총회가 대거 몰려 올해 주총 시즌의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3월 정기주총에서 의결권 행사의 방향을 놓고 가장 관심이 쏠리는 기관은 단연 국민연금이다.

자산운용 규모가 1천조 원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기관투자자인 데다 대부분 국내 주요 상장사에서 2~3대 대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주주총회 의결과 관련해 반대 등 의견을 표명할 때마다 ‘국민연금의 태도가 소수 주주의 의결권 행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캐스팅 보트가 될 수 있다’ 등 평가가 나온다.

올해는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하며 국내 기업들의 주주배당 강화 등 기업가치 제고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책 환경 변화에 따라 공공기관인 국민연금의 역할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

특히 정부는 국민연금이 참여하고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행동 지침)를 개정해 기업들의 주주환원 강화를 촉진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2월26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의 밸류업 노력을 스튜어드십 코드에 반영하는 것은 일본에도 없는 인센티브”라고 말했다.

이번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와 관련해 가장 시선이 쏠리는 기업은 삼성물산, 한미약품, 포스코홀딩스, KT&G, 금호석화, 고려아연 등이 꼽힌다.

특히 포스코홀딩스는 장인화 회장 후보의 선임을, KT&G는 방경만 대표이사 사장 후보의 선임을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서 결정하는 만큼 국민연금의 행보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새다. 국민연금은 포스코홀딩스 지분 6.71%, KT&G 지분 6.31%를 들고 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2월28일 국내 언론과 통화를 통해  “포스코홀딩스의 사외이사 전원은 배임과 청탁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입건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호화 이사회 논란 등과 관련해 과거 사외이사 활동이 과연 독립적이었는지 의구심이 드는 상황”이라고 직접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국민연금이 포스코 회장 선임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KT&G 주주총회에서도 사장 선임과 관련해 적극적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 KT&G 2대주주인 기업은행은 주주제안으로 사외이사 선임안건을 내는 등 KT&G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는 주주환원 강화를 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이 주요 현안으로 꼽히고 있다. 영국계 행동주의펀드 팰리서캐피탈은 직접 국민연금에 주주환원 강화에 역할을 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주주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금호석유화학은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 박 회장의 조카이자 금호석유화학 최대 개인주주인 박철완 전 상무가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양측의 지분율 차이가 5%포인트 정도로 크지 않아 9.27%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 외에도 한미약품·고려아연 등에서 오너 간 표대결이 벌어져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쥘 여지가 존재한다. 

다만 국민연금의 실질적 역할을 두고 의구심도 없지 않다. 재벌 총수 일가가 막강한 지배력을 보유한 한국의 기업 환경에서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의 결론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이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에서 재벌의 영향력을 놓고 블룸버그는 “삼성전자부터 현대차까지 한국의 대기업 재벌들은 비정상적 수준의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며 “재벌 구조 논란과 소액주주들을 외면하는 성향이 한국 기업의 가치가 글로벌 대비 저평가된 원인 중 하나”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국내 기업에서 대체로 많아야 10% 정도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국내 주요 대기업에는 늘 특수관계인 지분까지 합쳐 20~40% 수준의 지분을 보유한 총수 일가가 있다. 사실상 국민연금의 선택이 총수 일가의 의사결정을 막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닌 셈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반대 의결권 행사 등이 실제 주주총회 결론으로 이어진 사례는 드물다.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실이 지난해 4월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22년 주주총회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 803건 가운데 실제 부결로 이어진 안건은 1.24%인 10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비율도 지난해에는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전체 의결권 행사에서 반대표를 던진 비율은 2023년 13.8%로 2022년 15.3%보다 감소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