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기후위기 개도국 지원 합의 '속 빈 강정', '1천억 달러 기금' 공수표 가능성

▲ 유엔의 기후위기 개도국 지원을 위한 자금 조성 합의가 속 빈 강정이 될 수도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비즈니스포스트] 이달 말 개최되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본회의를 앞두고 세계 각국 대표들이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한 자금 조성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자금 조달 수단은 확정된 데 반해 자금 지원 규모는 COP28 본회의를 3주 앞둔 현 시점까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아 기금이 사실상 ‘텅 빈 계좌’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5일(현지시각) 블룸버그와 로이터 등 주요 외신들은 유엔 ‘기후 손실과 피해 기금’을 위한 준비위원회(Transitional Committee)가 4일까지 이틀 동안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에서 5차 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자금 조달 방안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이번에 발표된 합의안에 따르면 손실과 피해기금은 4년 단위로 자금 조달 계획을 수립해 운영된다. 첫 운영 주최자로는 세계은행(WB)이 선정됐다.

자금 조달 방안과 관련,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자금 지원국들은 위험분담제도와 재무정책 개정 등 기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재정 확보 수단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가디언을 통해 “특정 국가나 일부 국가들의 한정된 재무 지원만으로는 기금 운영을 위한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다”며 “따라서 우리는 협상을 통해 다양한 자금 조성 방안 등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확정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술탄 알 자베르 COP28 의장은 5차 회의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수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후변화로 생활과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며 “그들은 우리가 COP28에서 기금을 설립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손실과 피해기금 설립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안에는 기금 설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달 규모가 명시되지 않아 알맹이가 빠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열린 COP27에 이어 올해 9월 열린 ‘2023 아프리카 기후 정상회의’에서 미국과 독일 등 주요 선진국들은 손실과 피해기금에 연간 1천억 달러(약 130조 원)가 넘는 자금 지원을 약속한 적 있다.

심지어 미국 대표단은 5차 회의에서 지원금 조성을 위한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표단은 이번 자금 조성안 문건에 모든 금액은 ‘자발적인 지원’으로 구성돼야 한다는 조항을 명시하고자 했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로이터의 사실 확인 요청에 “우리(미국 연방 정부)는 조성안의 합의문이 지원금의 자발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반영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엔 기후위기 개도국 지원 합의 '속 빈 강정', '1천억 달러 기금' 공수표 가능성

▲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시내의 한 건물에 설치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설치물 앞을 걸어가는 시민. <연합뉴스>

하짓 싱 국제기후행동네트워크 국제정치전략대표는 블룸버그를 통해 “이번 자금 조성안은 텅 빈 은행 계좌에 불과하다”며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지역 커뮤니티들은 이미 수백억 달러가 넘는 피해를 입고 있는데 자금 조성 방법에만 합의한 것은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지구 평균 기온은 2020년 기준으로 산업화 이전 대비 1.09도 정도 올라가 과학자들이 임계점으로 여기는 '1.5도'에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개발도상국들이 입는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는 벌써 크게 늘어나고 있다. 

뉴질랜드 웰링턴 빅토리아 대학 연구진이 10월 내놓은 연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기후 피해 규모는 시간당 1600만 달러(약 216억 원)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기존 연구와 달리 재산 피해와 함께 인명 피해까지 금액으로 환산해 반영한 결과였다. 인명 피해는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연구를 주도한 일란 노이 빅토리아 대학 교수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 규모를 추정하는 보편적 방식은 피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인명 상실에 따른 피해를 축소해 선진국들이 입는 경제적 피해를 과대평가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유엔환경계획(UNEP)에서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2일 공개된 '2023 기후적응 격차 보고서(AGP)'에 따르면 개발도상국들의 피해 복구 및 대책 마련 등을 위해 필요한 자금은 연간 최대 3870억 달러(약 503조 원)로 집계됐다.

반면 2022년 기준 개발도상국들에 실제로 지원되는 금액은 210억 달러(약 27조 원)로 필요한 금액의 약 5%에 불과했다.

이렇듯 개발도상국들이 기후변화로 더 많은 손실과 피해를 입는 것과 관련, 손실과 피해기금은 기후변화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선진국들이 이를 보상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제안된 국제기금이다.

이 기금은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 본회의에서 처음 제안됐는데, 설립 여부와 지원규모를 놓고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 사이의 협상에 난항을 겪어 폐막을 이틀 연장한 끝에 겨우 설립이 합의됐다.

당시 지원 규모는 기금 준비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운영은 2024년까지로 미루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COP27이 종료된 후 준비위원회가 결성돼 기금의 운영 계획을 확정 짓기 위한 회의들이 열렸으나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이 기금 규모와 자금 조달 방식을 놓고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4차 회의까지는 모두 무산됐다.

결국 5차 회의를 통해 자금 조달 방안은 확정됐지만 조달 규모에는 합의에 이르지 못해 COP28 본회의를 통해 기금 설립이 확정되고 2024년 초 실제 운영에 들어가기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COP28은 이달 30일부터 12월12일까지 두바이 엑스포시티에서 열린다. 손영호 기자
 

유엔 기후위기 개도국 지원 합의 '속 빈 강정', '1천억 달러 기금' 공수표 가능성

▲ 9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2023 아프리카 기후 정상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술탄 알 자베르 COP28 의장.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