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기업들이 '트럼프 리스크'에 '대통령 탄핵정국'까지 겹치면서 2025년 투자 계획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계엄 쇼크'에 이은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불안정한 국내 정치 상황으로 재계의 2025년 투자시계가 사실상 올스톱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 출범으로 관세 부과, 보조금 폐지 등이 가시화하고 있는 데다, 비상계엄 후폭풍으로 정부 기능이 마비되는 등 예측 불가능한 경영환경에 맞닥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반도체 특별법안’, ‘전력망 확충법안’ 등도 탄핵 정국이 해소돼야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예상돼, 기업 투자를 끌어낼 인센티브 효과도 약해지고 있다.
6일 재계 취재를 종합하면 가뜩이나 어려운 글로벌 경제 환경에 국내 정치까지 불안해지면서 국내 기업들의 투자 리스크가 급격히 커진 것으로 분석된다.
기업들은 통상 연말 정기인사를 마친 뒤 12월에 다음해 투자 계획을 확정한다.
하지만 국제통상 환경 불확실성이 확대된 데다가 국내 정치 상황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어, 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매우 보수적으로 세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최근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56.6%가 ‘내년 투자계획을 아직 수립하지 못했다’고 응답했고, 11.4%는 투자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투자계획을 세운 기업(32%)도 이전보다 투자를 줄이겠다는 곳이 늘리겠다는 곳보다 더 많았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조속히 수립할 수 있도록 금융·세제 지원 등 과감한 인센티브로 적극적인 투자를 유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 지원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관련해 국무위원 전원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정부 정책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국회도 계엄과 탄핵 정국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반도체 특별법안과 같은 경제와 관련된 법안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여기에 여당인 국민의 힘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보이콧해 탄핵 정국을 둘러싼 여야간 대치가 첨예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민의힘이 발의한 반도체 특별법안은 반도체 연구개발 종사자들에게 주 52시간 근로 규제적용의 예외를 두는,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소득 사무직 근로시간 적용 제외)' 방안을 포함,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직접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담겨있다.
재계 관계자는 “반도체 특별법안이 여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에서 표류하는 와중에 탄핵 정국에 들어가면서 국회 논의가 완전히 중단됐다”며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력망 특별법안 통과도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안정적으로 전력 공급을 위한 전력망 특별법안에는 국가 기간 전력망을 확충할 때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신속한 전력망 확충 체계를 구축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철강 등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는 기업들의 기본 인프라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당초 국회 산자위는 오는 9일 전력망 특별법안을 논의하는 법안소위를 열 예정이었지만, 최근 정치권 상황 급변으로 상임위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024년 11월13일 워싱턴 D.C. 하얏트리젠시 호텔에서 열린 공화당 의원들과의 콘퍼런스에 참석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국내뿐 아니라 해외 투자도 불확실성이 커져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보조금 지급 정책에 따라 삼성, SK, 현대차, LG 등 국내 4대 그룹이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의 현지 생산공장을 미국에 건설하겠다며 앞서 밝힌 총 투자액은 104조2천억 원에 달한다.
특히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첨단제조생산 세액공제(AMPC)에 따라 보조금을 받으면서 미국 투자를 확대해왔다. 올해 상반기 IRA에 따른 국내 배터리 업계의 보조금 수령 액수는 8400억 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측이 IRA에 따른 보조금 혜택을 대폭 줄이거나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10월부터 미국 조지아주에서 전기차 전용 공장 시험생산에 들어간 현대차그룹도 전기차 보조금이 폐지되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트럼프 2기 정부의 '정부효율부'(DOGE) 수장으로 내정된 일론 머스크는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 의회에서 전기차 세액 공제와 관련한 질의에 “모든 공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반도체 지원법(칩스법)도 축소 혹은 폐지 가능성이 나온다.
미국 상무부가 약속한 반도체 설비투자 보조금은 삼성전자 64억 달러(약 9조 원), SK하이닉스 4억5천만 달러(약 6천억 원)에 이른다. 아직 최종 계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정책 불확실성에 투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인 만큼 정부의 외교적 대응 능력이 절실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정부가 사실상 미국 정책 변화에 신속한 대책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법무법인 율촌은 최근 ‘트럼프 행정부 2기의 정책과 국내 통산·산업 영향’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 재집권에 따른 IRA 보조금 축소와 함께 일각에서는 반도체 관련 보조금과 세액공제 등 인센티브 축소 불확실성이 존재하다고 우려하고 있다”며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언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