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회사들이 민관협력을 통해 동남아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주춤했던 아세안시장 개척이 리오프닝과 맞물려 투자금융 글로벌 스탠다드 확보를 목표로 다시 빠르게 진행되는 모양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세일즈맨을 자처하며 지원 사격에 나서 이목을 끈다. 아세안 금융허브인 싱가포르와 함께 수교 50주년을 맞는 인도네시아, ‘포스트 중국’ 베트남, 신흥시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캄보디아 시장 선점을 위한 행보로 읽힌다. 이에 비즈니스포스트는 특별취재팀을 꾸려 금융시장 성장 발판을 구축하고 있는 동남아 시장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보고,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3개국에서의 국내 금융업계 활약상을 생생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프롤로그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금융강국이 되는 지름길, 아세안에 있다
 은행 증권 보험 빅테크도 예외 없다, 아세안 돈줄 장악 특명
김주현도 이복현도 영업맨, K금융 길 당국도 함께 닦는다
④ [인터뷰] 최희남 전 KIC 사장 “대표 브랜드 육성에 정부도 나서야”
⑤ [인터뷰] ‘동남아고’ 고영경 “아세안 공략, 디지털금융으로 직진하라”
⑥ [인터뷰] 한투운용 사장 배재규 “베트남 질적 성장 가장 주목해야”

 
[다시뛰는 K금융 프롤로그④] 최희남 전 KIC 사장 “대표 브랜드 육성에 정부도 나서야”

최희남 전 한국투자공사 사장이 4월 말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연구원에서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비즈니스포스트] “K금융은 대표 브랜드가 없다.”

최희남 전 한국투자공사 사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진행한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에서 K금융의 현 주소를 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

최 전 사장은 기획재정부 관료 출신으로 국제금융 전문가로 손꼽힌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과장, 기획재정부 국제금융협력국장, 국제금융정책국장,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 등 공직 생활의 대부분을 국제금융 분야에서 일했다.

이후로도 세계은행그룹 상임이사,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 한국투자공사 사장, 외교부 금융협력대사 등을 거쳤다. 지금도 자본시장연구원 초빙연구위원으로 일하며 외국계 은행인 SC제일은행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최 전 사장은 인터뷰 내내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질문에 대답했다. 하지만 K금융의 해외진출을 위한 쓴소리를 할 때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내면에는 K금융의 위상이 기대만큼 올라오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과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해외시장 확대는 국내 금융산업의 필수 과제로 여겨지지만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시장이 국내 금융사에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국내 금융사가 해외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비즈니스포스트가 최 전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우물 안 개구리’ K금융, 민관 협력 강화와 인재 육성이 필요

최 전 사장이 국내 금융산업의 해외 진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국내 금융시장은 경제성장률 둔화와 고령화, 가계부채 우려 등에 따라 이미 성장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최 전 사장은 “2000년대 이후 저출산과 고령화가 이어지고 주력산업이 성숙하면서 우리경제의 잠재성장률은 계속 내려가고 있다”며 “금융산업 역시 투자 수익률이 낮아져 국내에선 성장이 힘든 만큼 지속 성장을 위해선 해외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봤다.

국내 금융산업의 해외진출 필요성은 이토록 크지만 최 전 사장은 아직 한국 금융이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2010년 이후 국내 금융사 해외사업의 자기자본과 영업이익은 크게 성장했으나 여전히 자기자본 등 규모 면에서 아시아 10위권 내 투자은행(IB)이 전무하다. 사실 K금융은 현재 실체가 없는 부끄러운 상황이다”고 평가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K반도체의 ‘삼성전자’, K팝의 ‘방탄소년단’과 같은 K금융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JP모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노무라홀딩스 같은 대표 브랜드가 하나라도 생기면 K금융의 전체적 위상이 한 번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 브랜드를 위해선 개별 금융사의 노력만큼이나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특히 국내 금융사들이 소매금융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는 동남아 등 신흥국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 전 사장은 “선진국은 사실 자유롭게 경쟁을 하니까 규제가 많지 않은데 동남아 신흥국은 아직도 규제가 많다”며 “이런 규제는 개별기업이 뚫어 낼 수 없다. 현지 공관, 상공회의소 등이 공동 대응해서 꾸준히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부는 이런 걸 기획하고 현지 당국과 소통을 강화해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바라봤다.

해외사업 전문가 육성을 위한 민관의 노력에 대해 아쉬움도 드러냈다.

그는 “해외사업은 실은 네트워크 비즈니스, 이른바 안면장사인데 우리는 정부도 일반기업도 사람을 너무 자주 바꾼다”며 “계속 글로벌업무를 하면서 성장해야 서로 신뢰를 쌓고 카운터파트너로서 시너지를 낼 텐데 이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참 크다”고 지적했다.

해외근무를 논공행상 측면에서 바라보는 금융권 인사 문화도 근절해야 할 악습으로 꼽았다.

최 전 사장은 “아직도 그룹사 인사용으로 해외사업 책임자 자리를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진짜 잘못된 인사 행태다”며 “국내 인사 차원에서 의욕도 없는 사람 고생했으니까 해외 가서 2~3년 있다가 들어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미래에셋그룹을 예로 들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해외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최 전 사장은 “미래에셋이 인도에서 성과를 내기까지 20년이 걸렸는데 앞에 15년은 거의 성과가 없었다. 단기 성과평가를 했다면 지금 인도에서 미래에셋은 없었을 것”이라며 “방향성이 맞다면 이사회 차원에서 장기적 시각으로 해외사업을 계속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K금융 우물 벗어나기 위한 변화는 이미 시작, 가능성은 무한하다

최 전 사장은 K금융이 아직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고 있지만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평가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변화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됐다고도 바라봤다.

은행이 과거 단순히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동반진출을 하던 것에서 벗어나 아세안 등 해외시장에서 현지 은행을 인수하며 현지화에 힘주고 있는 것을 대표 사례로 꼽았다.

그는 “은행이 아세안에서 현지화를 추구하며 가능성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며 “다만 은행들의 싸움은 쉽지 않을 수 있다. 해외 주요 은행들도 현재 국내에서 소매사업을 대부분 접었는데 국내 은행들 역시 아세안에서 진정한 현지 은행으로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톱5 안에는 들어야한다”고 말했다.

최근 10여 년 사이 해외시장에 진출한 증권사의 해외 점포수가 줄고 자산운용사의 해외 점포수가 늘어난 점도 긍정적 변화로 꼽았다.

최 전 사장은 “증권사는 과거 한국주식 중개업무 등을 위해 해외에 점포를 많이 냈는데 이제는 외국인이 직접 한국에 투자해 현지 점포수가 많이 줄었다”며 “자산운용의 경우 반대로 우리가 해외에 직접 투자하는 사례가 늘면서 해외진출이 많이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의 해외 점포수는 2010년 93개에서 2022년 3분기 69개로 약 13년 사이 26% 줄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말 이미 63개까지 줄었다가 팬데믹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국내 자산운용사의 해외 점포수는 22개에서 67개로 3배 넘게 증가했다.

최 전 사장은 K금융의 중장기 목표로 세계시장에서 원화 채권과 증권이 더 많이 유통되는 원화 위상 강화를 들었다.

원화의 위상이 높아지면 금융의 펀딩 비용이 낮아지고 국내 금융산업의 경쟁력이 상승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 전 사장은 “국내 금융산업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펀딩비용이 높다는 건데 원화 상품이 더 많이 유통되면 비교 우위가 높아질 수 있다”며 “금융은 기본적으로 돈을 중개해주는 사업이다. 세계시장에서 원화거래가 늘면 자연스레 K금융 위상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금융시장에서 원화의 거래 확대는 중장기적으로 진행돼야 할 꿈같은 목표지만 정부는 계속 힘을 줘야 한다”며 “정부는 단계적으로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원화표시 국제 무역거래 및 금융거래 활성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 전 사장 여전히 한국경제와 금융산업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5월 초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다시뛰는 K금융 프롤로그④] 최희남 전 KIC 사장 “대표 브랜드 육성에 정부도 나서야”

최희남 전 KIC 사장(오른쪽)이 2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 한국 세션에서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의 발표를 듣고 있다. 이날 세션은 최 전 사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밀켄연구소>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는 ‘정크본드의 황제’로 불리는 마이클 밀켄 밀켄연구소 회장이 매년 여는 투자자 콘퍼런스로 ‘미국판 다보스 포럼’으로 불린다.

이번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 자본시장 소개를 목적으로 하는 단독 세션이 열렸는데 최 전 사장이 한국투자공사(KIC) 사장 시절 밀켄 회장과 맺은 친분이 세션 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 전 사장은 “KIC 사장 시절 매년 밀컨 콘퍼런스를 갔는데 그쪽에서도 KIC를 찍었는지 밀켄 회장 집에 초대 받아 갈 정도로 상당히 친해졌다”며 “밀켄 회장이 한국 투자에도 관심이 많아 콘퍼런스 관련 여러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한국 단독 세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최 전 사장은 인터뷰 말미 밀켄 회장의 베벌리힐스 집에 초청받아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줬다. 과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자 주연배우 클라크 게이블이 살던 더 없이 고급스러운 집이었다.

밀켄 회장은 그곳에서 미국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샤킬 오닐에게 선물 받은 400mm짜리 대형신발을 최 전 사장과 함께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최 전 사장 역시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