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체력 effect] 일이나 회사를 고를 때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은 뭘까

▲ 문학동네 '친밀한 이방인' 책 표지 이미지와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 예고편의 한 장면.

일이나 회사를 고를 때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은 뭘까? 내가 기준으로 삼은 건 돈이나 재미, 아니면 사람이었다.

일하던 출판사를 다니는 게 힘들어서 그만둘까 말까 고민될 때마다, 세 가지를 놓고 따져 보았다. 셋 중 하나만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면 꾹 참고 다니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중에서 돈이 가장 우선순위일 것 같은가? 막상 퇴사를 결심하는 순간이 오면, 돈의 위력이 제일 먼저 약해졌다.

“(새경 많이 받는)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옛 속담이 괜히 나왔겠는가. 오히려 만드는 책들이 재미있거나 마음 맞는 동료들이 곁에 있을 때, 훨씬 오래 버틸 수 있었다.

프리랜서로 전업하고 나니, 꼬박꼬박 월급 받던 때와 비교하면 수입은 불안정하다. 대신 일할 때와 놀 때를 내 멋대로 정할 수 있어 몸과 맘이 자유롭다. 작가와 강사로서 맞닥뜨리는 새로운 경험들이 재미나기도 하다.

다만 회사에 출근할 때와 비교하면 딱 한 가지가 아쉽다. 비슷한 취향과 관심사를 두고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주고받던 동료들이 시시때때로 그립다. 우리는 “어느 식당 밥이 맛있어?”보다, “요즘엔 무슨 책이 재밌어?”라는 질문을 더 자주 했다.

그들 덕분에 내 호기심엔 날이 섰고, 알아두면 쓸 데 있는 신기하고 잡다한 정보를 놓치지 않았다. 단순한 수다를 넘어 문화의 첨병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요, 책을 만드는 일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정한아 작가가 쓴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읽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만 보고, 당연히 새로 나온 책이라 착각했다. 오호라! 첫 줄부터 흥미가 당겼다. 1인칭 화자인 소설가가 과거에 썼던 소설이 도용되어, 뜬금없이 신문 광고에 실리다니!

도용한 당사자는 ‘이유미’라는 여성인데, 그 족적을 찾아 헤매다 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소한 거짓말로 시작했으나 점점 과감하게 타인을 속이는 그의 가짜 인생이 대사기극처럼 펼쳐졌다. 여우가 탈바꿈하듯, 세 남자의 아내와 한 여자의 남편으로까지 변신하는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런 소설을 나만 알고 있을 순 없지. 다른 분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서 SNS에 간단히 책 소개를 올렸다.

“엇! 요 책 재밌는데요? 최근 읽은 소설 중 가장 흡입력이 강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저리 가라예요. 영화로 만들면,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는 캐릭터 탄생할 듯.”
 
[마녀체력 effect] 일이나 회사를 고를 때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은 뭘까

▲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 예고편 이미지.

즉시 몇 개의 친절한 댓글이 달렸다. 아이쿠! 신간이 아니라 2017년에 나온 소설이구나. 뭐라고? 이미 몇 달 전에 '안나'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가만있자, 배수지가 나온다는 그 '안나'? 자본을 댄 유통 기업이 드라마 감독의 창작권을 침해해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뉴스를 보긴 했다. 원작 소설과 제목이 달라서, 미처 드라마까지 찾아볼 생각을 못했다.

아! 완전히 감 떨어졌다. 혼자 집에서 일하며, 흘러넘치는 정보를 띄엄띄엄 읽다 보니 이렇게 뒷북이나 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만약 출판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당장 점심시간에 온통 밥풀을 튀겨 가며 이 소설 얘기만 떠들었을 거다. 호기심 많은 편집자들은 남에게 질세라,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정보를 줄줄 풀어냈겠지. ‘리플리 증후군’을 운운하며,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부터 '리플리', '애나 만들기'까지 비슷한 영화의 계보를 술술 읊어댔을 것이다.

“소설 쪽 스토리를 그대로 살렸다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주인공이 끝내는 남장으로 사는 걸 보고 싶었는데.” “이주영 감독이 4년 가깝게 집필 작업을 했대요.” “미술계의 그 유명한 허위 학력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거라죠?”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는데, 사측이 감독 허락도 없이 8부작을 제멋대로 6부작으로 편집해서 공개해 버렸잖아.”

“나는 일부러 감독판을 처음부터 다시 봤어요. 배역들 개성이 섬세하게 살아 있던데? 작품 완성도가 훨씬 높더라고요.”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창작권에 대한 개념 같은 게 없나?” “갑질도 유분수지. 아무리 OTT라지만 자본의 무식과 횡포가 도를 넘었어.” “그래도 다행이야. 대종상 영화제에 처음으로 신설된 시리즈 영화 감독상을 받았으니까 업계의 인정을 받은 셈이지.”

그 짧은 점심시간 동안, 우리는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의 세상을 두루 섭렵할 것이다. 그뿐인가. 더 나아가 정치와 사회 문제까지 아우를 것이다.

학력 만능주의 세상이 가져온 병폐. 고상한 탈을 쓰고 뒤로는 온갖 천박함을 자행하는 상류사회의 이중성. 대중 앞에서는 정의를 외치지만 사생활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정치가. 과연 무엇이 더 가식이고, 사기라는 말인가. 그러니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는지 성토할 것이다.

커피 타임과 함께 우리 대화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책상에 앉은 각자의 머릿속 바퀴들은 멈추지 않는다. 더 깊숙하고 자세한 정보를 찾아갈 게 분명하다. 여기서 더욱더 나아가 과연 어떤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유가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책 한 권을 두고도, 얇고 넓고 깊은 전방위적 대화가 가능했던 동료들이 곁에 있을 때가 좋았다. 되돌아보니 그들이야말로 내 회사 생활의 원천이었다.

여기저기서 송년회를 여는 시기가 되니, 마음 맞고 말이 통하던 동료들이 더욱 그립다. 아! 그나저나 뚝 떨어진 감을 어떻게 다시 주워 올리나. 2023년에는 아무래도 ‘퇴직한 편집자들의 독서 클럽’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보다. 마녀체력 작가
작가 이영미는 이제 ‘마녀체력’이란 필명으로 더 유명하다. 27년간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살았다. 한국 출판계에서 처음으로 대편집자란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지만, 갈수록 몸은 저질체력이 되어 갔다.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15년간 트라이애슬론으로 꾸준히 체력을 키워 나갔다. 그 경험담을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주제로 묶어 내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출판 에디터에서 작가로 변신했으며 <마녀체력> <마녀엄마> <걷기의 말들>을 썼다. 유튜브 지식강연 '세바시'를 비롯해 온오프라인에서 대중 강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