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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조지 소로스의 천재적인 ‘방아쇠 당기는 능력’

이재우 sinemakid222@gmail.com 2024-01-29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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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조지 소로스의 천재적인 ‘방아쇠 당기는 능력’
▲ 나치가 점령한 헝가리에서 유대인 소년으로 살았던 조지 소로스(93)는 만 열여섯 나이에 고국을 떠나 신세계 영국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영국에서 10년을 지낸 후 스물 여섯 나이에 미국에 진출, 월가에서 가장 도발적인 트레이더로, 가장 영향력 있는 투자가로 자리매김했다. <조지 소로스 페이스북>
[비즈니스포스트] “소로스의 가장 큰 경쟁력은 ‘천재적인 방아쇠 당기는 능력(brilliance in pulling the trigger)’이다.”

월가의 전설 조지 소로스(George Soros·93). 그의 평전을 쓴 저널리스트 마이클 카우프만은 소로스의 ‘오른팔’이었던 스탠리 드루켄밀러(Stanley Druckenmiller)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방아쇠 당기는 능력’이 소로스와 다른 리더를 구분 짓는 결정적 차이라는 것이다. 비즈니스 구루(guru)들은 말한다. 리더가 중요한 결정에서 방아쇠 당기는 타이밍을 놓친다면 조직은 끔찍한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고. 오랫동안 소로스의 펀드를 실질적으로 운용했고 훗날 월가의 거물로 성장하는 드루켄밀러의 말을 들어보자.

“소로스의 방아쇠 당기는 능력은 분석이나 예측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용기에 관한 것이죠. 굳이 설명하자면 적절한 순간이 오면 기꺼이 모든 것을 내릴 수 있는 배짱 같은 거죠.”(‘SOROS’, 마이클 카우프만 저, 베스트코리아 출판)

‘방아쇠 당기는 능력’은 한마디로 실행(Execution)을 의미한다. 탁월한 경영구루 마이클 포터 교수의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 개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실행은 리더를 차별화하는 제 1덕목임에 틀림없다. 

실행의 중요성을 임팩트 있게 정의 내린 경영인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의 공동창업자 다니엘 에크(Daniel Ek)는 “실행이 95퍼센트”(Ideas are 5%…execution is 95%)라고 했다. 

풀어쓰자면 “바보야, 문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실행이야. 잊지마, 실행이 가장 중요한 마지막 95퍼센트라구”쯤 되지 않을까? 분명한 건 모든 리더에게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순간은 언제나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새해 들어 기업들이 이구동성 내세운 일성은 불확실한 환경에 대한 대비였다. 대비로만 되겠는가? 대비책을 위한 대비책까지 2중으로 무장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다. 필자가 보건대 과거를 통틀어 이같은 불확실한 시장을 가장 즐겼던 경영인은 조지 소로스가 아닐까 싶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조지 소로스의 천재적인 ‘방아쇠 당기는 능력’
▲ 조지 소로스는 지난해 6월 재단과 회사의 경영권을 아들 알렉스 소로스(사진 오른쪽)에게 물려줬다. 사실상의 현역 은퇴였다. 소로스는 “오류와 불확실성에 투자하라”고 했다. 시장이 항상 틀렸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월스트리트 등 다른 사람들을 따라한다면 ‘형편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you're doomed to do poorly)이라고도 지적했다. <알렉스 소로스 X(옛 트위터)>
먼저 떠오르는 게 1971년의 일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이른바 ‘닉슨 쇼크’(금본위제 탈퇴)를 선언했는데 이는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의 전환을 예고했다. 70년대 초 이 변동환율제의 파도에 올라타 엄청난 돈을 긁어모은 이가 소로스였다. 

초창기 헤지펀드에 치중했던 소로스는 단기 시장에 치중했고 높은 레버리지(leverage: 자본금을 지렛대로 삼아 더 많은 외부 자금을 차입하는 것) 거래에 의존했다. 

대영제국의 근간을 흔든 것도 그였다. 1992년 9월 발생한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 사건이다. 당시 소로스는 불안정한 영국 파운드화를 흔들면서 대거 매도,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언론은 그를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을 무너뜨린 사나이(the man who broke the Bank of England)’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로스는 영국인들에게 여전히 빌런(악당)으로 기억되고 있다. 

소로스는 금융시장의 이론가이자 철학자였다. 재귀성 이론(theory of reflexivity)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투자 철학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장의 불확실성과 오류에 투자하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그의 중요 어록이기도 하다) 평전을 쓴 마이클 카우프만은 소로스에 대해 “철학자의 외투를 입은 투자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랬던 소로스도 최근 현역 은퇴했다. 월스트리트저널(2023년 6월 12일)은 ‘월가에서 소로스의 시대는 끝났다(The Soros Era Is Over on Wall Street)’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지 소로스가 자신의 재단과 250억 달러 규모의 제국 통제권을 아들 알렉스 소로스에게 물려줬다”고 했다. 

사실 소로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작명(Soros라는 성과 회사 이름 퀀텀 펀드)에 대한 이야기다. 1940년대 헝가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에스페란토어(폴란드 안과의사 자멘호프가 창안한 국제어)는 유대계 소년 조지 소로스에게는 ‘구원의 복음’과도 같았다. 나치와 공산주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조국 헝가리를 탈출해 영국으로 건너갈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에스페란토어였기 때문이다. 

소로스의 아버지는 에스페란토어로 잡지를 발행하고 회고록을 쓸 정도로 에스페란토어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티바다르 슈바르츠(Tivadar Schwartz). 소년이 여섯 살 때 아버지는 가족의 성을 슈바르츠에서 소로스(Soros)로 바꿨다. 유대계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유대계 냄새가 덜 나는’ 성을 택한 것이다. 

소로스는 에스페란토어로 ‘날아오를 것이다(will soar)’라는 뜻이라고 한다.(파이낸셜타임스). 소년의 이름은 그렇게 조뤼지(헝가리식 발음) 슈바르츠에서 조지 소로스가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유로운 나라에서 배우길 원했다. 

헝가리 밖으로 나갈 명분이 필요했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스위스에서 열리는 에스페란토어 학회 모임 참석 대표자로 등록했다. 그 덕에 아들은 ‘생명줄’과도 같은 영국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소년 소로스가 영국으로 건너간 것이 1947년, 그의 나이 막 열여섯을 지나고 있었다. 

이렇듯 에스페란토어는 소로스에겐 새 날개를 펼치게 해준 선물이자 복음이었다. 세월이 지나 그는 ‘날아오를 것’이라는 성의 뜻처럼 실제로 억만장자로 날아올랐다. 여기에 그의 회사명인 퀀텀 펀드(Quantum Fund)의 의미까지 더해지면 흥미는 더 증폭된다.

퀀텀(Quantum: 양자), 이 심오한 물리학 용어를 조지 소로스는 1970년대 말에 자기 회사의 이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로스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회사(Soros Fund Management)를 설립한 건 1973년이다. 

앞서 그는 1968년 열두 살 아래인 26세의 짐 로저스(현재 로저스홀딩스 회장)를 영입해 함께 일했다. 두 사람은 12년간 한 팀으로 일하다가 1979년 무렵 결별했다고 한다. 당시 소로스는 자신의 이름을 대신할 새로운 펀드 회사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퀀텀 펀드’였다. 

퀀텀은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의 기본값으로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그리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의 연구 업적으로 퀀텀 점프(Quantum Jump) 즉, 양자 도약이라는 말이 태동하게 되었다. 

불연속적인 한 값이 다른 값으로 껑충 뛰면서 변화할 때 이를 ‘퀀텀 점프’라고 표현한다.(카이스트 물리학과 이순칠 교수) 퀀텀 점프가 과학의 범주를 넘어 일상 용어(대도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당초에는 없던 퀀텀 리프(Quantum Leap)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말이 나온 김에 궁금증 좀 풀고 가자. 양자 물리학에서 나온 퀀텀 점프와 퀀텀 리프라는 말이 일상에 처음 쓰인 건 언제부터였을까?

‘문구 찾기 웹사이트(Phrase Finder website)’ 설립자인 게리 마틴(Gary Martin)이라는 사람에 따르면 퀀텀 점프는 1924년 미국 국립과학원 학술지(PNAS: Proc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 USA)에서, 퀀텀 리프는 그보다 6년 뒤인 1930년 미국의 한 철학 저널(Journal of Philosophy)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퀀텀 리프가 유명세를 갖게 된 건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 NBC에서 방송된 동명의 드라마(Quantum Leap)를 통해서다. 양자론을 연구하던 한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양자 가속기 안으로 뛰어들면서 생기는 일을 다뤘다. 

복기해 보자면 조지 소로스가 퀀텀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건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소로스의 회사는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연평균 30%의 높은 수익률을 달성하면서 이름 그대로 ‘퀀텀 점프’를 이뤄냈다.

월가로 발걸음을 돌려 보자. 런던의 작은 은행에서 차익거래를 담당하던 소로스가 미국으로 진출한 건 1956년, 26세 때였다. 소로스가 한창 경력을 쌓던 1970~80년대 월가는 ‘탐욕의 거리’로 묘사됐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스트리트’(1987년)에 나오는 기업 사냥꾼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역)는 ‘탐욕은 좋은 것(Greed is good)’이라며 무차별적으로 탐욕을 전파했다. 이 고든 게코 역에 영감을 준 실제 인물이 이반 보에스키였다. 

당시 보에스키의 이름은 탐욕과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후 어떻게 됐을까? 내부자 거래 스캔들로 감옥에서 2년 넘게 복역하면서 몰락했다. 평생동안 ‘주식시장 접근 금지’라는 선고까지 받았다. 소로스는 극단적인 보에스키와는 많이 달랐다. 멈출 줄을 알았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조지 소로스의 천재적인 ‘방아쇠 당기는 능력’
▲ 투자와 투기 그리고 기부. 조지 소로스는 양극단에 서 있으면서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처음으로 자선 사업을 시작한 건 1970년대 후반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흑인 학생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조지 소로스 X(옛 트위터)>
그런 탐욕의 세계에서도 소로스는 스승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는 런던정경대에서 공부할 때 당대의 위대한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82년 포퍼의 명저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이름을 따서 기부 단체 ‘열린 사회 기금(Open Society Fond)’을 만든 건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소로스의 기부 하이라이트는 1991년 헝가리에 설립한 중앙유럽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이다. 동구 유럽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그는 매년 이 대학에 2천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기부금으로 대학을 세운 일은 존 D 록펠러(시카고대), 앤드루 카네기(카네기멜런대), 릴랜드 스탠포드(스탠포드대)를 빼고는 드문 일이다. 

“소로스의 이런 기부 노력을 개인과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방편이라고 몰아세워서는 안될 것이다. 단순한 자선과 속죄를 넘어서는 것이다.” 

‘탐욕의 경제학’(북플래너)을 쓴 키에런 파커(Ciaran Parker)가 소로스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 죽은 후에야 사람의 참다운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던가. 필자는 궁금하다. 부고 기사로 정평 있는 뉴욕타임스는 훗날 소로스를 어떻게 평가할지 말이다. 

노익장을 자랑하는 93세의 소로스에겐 무례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가상의 부고 기사를 써본다. 

“조지 소로스는 ‘현명한 돈키호테’였다. 한때 탐욕을 향해 돌진하다가 어느 순간 말(馬)을 세우더니 곧장 말 머리를 돌렸다. 기부(자선)라는 자신의 성(城)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탐욕에서 한 발 물러설 줄 알았고 대신에 기부에 한 발 앞장섰다. 투기꾼이라는 오명을 완전히 씻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는 위대한 자선가에 가까이 다가간, 게다가 정치적 목소리까지 낸 몇 안되는 ‘시대의 기사(騎士)’였다.”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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