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반도체 등 주력 사업에서 미국 현지 투자를 확대한다.

다만 이번 투자 확대 결정으로 미국과 무역분쟁을 벌이고 있는 주력시장 중국에서 사업추진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 대응방안 마련을 놓고 최 회장의 고민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Who] 미국 투자 늘리며 중국 보는 최태원, 지정학적 리스크 고심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미국과 파트너십을 강화하며 반도체, 배터리 등의 주력 사업의 확대를 추진한다. 사진은 2022년 5월24일 대한상공회의소 회관에서 '신기업가정신 선포식'을 개최할때 강연을 하는 모습. <대한상공회의소>


27일 재계에 따르면 최 회장이 미국에 15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반도체 연구개발(R&D)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놓고 SK그룹이 반도체사업의 무게중심을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려는 게 아니냐는 시선이 나온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 수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시장이지만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를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 회장으로서는 연구개발 협력뿐 아니라 반도체 패키징 시설을 구축해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을 받으려는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패키징이랑 반도체칩을 전자제품 내에서 완제품으로서 성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공정을 말한다. 

미국 상원은 현지시각 26일 자국 내 반도체기업에 520억 달러의 보조금과 시설투자액의 25%를 세액 공제하는 혜택을 담고 있는 ‘반도체지원법’에 관한 ‘토론 종결투표’를 진행해 찬성 64대 반대 32로 의결했다.

반도체지원법이 사실상 상원 문턱을 넘은 셈인데 하원 통과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과 중국에 반도체칩 생산시설을 두고 있는 SK하이닉스가 미국에 반도체 패키징 생산시설을 설립하면 미국 정부의 지원을 톡톡히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다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미국에 반도체칩 생산시설까지 설립해 '반도체 굴기(진흥)'정책을 추진하는 중국 정부를 자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선이 우세하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민감한 지정학적 문제가 얽혀 있어 SK하이닉스가 미국 사업을 하는데 있어 운신의 폭이 좁을 것”이라며 “SK하이닉스로서는 반도체칩 생산시설을 짓기보다는 생산된 칩을 포장하고 테스트하는 패키징 시설을 미국에 마련하는데 머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관측은 최 회장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화상면담에서 내놓은 미국 투자계획 발표로 미국과 무역분쟁을 벌이는 중국에서 SK그룹 계열사의 사업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그런 만큼 최 회장으로서는 중국 측 반응을 예민하게 주시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D램 생산공장을 두고 있는데 여기서 SK하이닉스 연간 D램 생산량의 50%가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우시공장에 반도체 초미세공정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들여 공장을 첨단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미국의 제재로 장비 반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중국 정부까지 SK그룹의 미국 내 투자를 문제 삼아 정책적 대응에 나선다면 SK그룹으로서는 주력사업에서 엄청난 불확실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전기차배터리 계열사 SK온은 2020년부터 중국 배터리사인 EVE에너지와 합작법인을 설립해 창저우와 후이저우에 배터리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옌청에 전기차배터리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대응에 따라서는 향후 배터리사업 운영도 어려워질 수도 있다. SK온의 중국 배터리 생산규모는 2024년 77GWh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2025년 유럽에서 생산할 배터리규모 77.5~92.6GWh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앞서 2017년 SK온의 모회사 SK이노베이션은 중국의 사드보복 조치로 베이징전공, 베이징기차가 합작해 설립한 배터리 생산법인 베이징 BESK테크놀로지의 가동을 전면 중단한 경험도 있다.

SK 홈페이지에 있는 브로슈어를 살펴보면 2020년말 기준 SK그룹은 중국지역 43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할 예정이다. 미국(31곳), 유럽(32곳)보다 사업 지역이 많다. 이뿐만 아니라 또 중국 내 매출 및 자산규모도 주요 지역 가운데 가장 크다.

최 회장은 13일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중국시장은 좋든 싫든 아직 상당히 큰 시장인 것은 사실인 만큼 가능한 우호적으로 잘 끌고 가는 게 좋다"며 "중국을 포기한다면 한국이 보유한 큰 시장을 포기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앞서 26일 최 회장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화상면담에서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의 분야에서 22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배터리부문에서 7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것까지 더하면 300억 달러가량을 미국에 쏟아붓기로 결정한 것이다.

SK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이 미국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어 미국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투자 확대 결정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SK텔레콤은 AI반도체 자회사 사피온을 미국에 세웠다. 사피온은 미국 IT기업을 대상으로 AI반도체 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전기차배터리와 관련해서는 SK온과 미국 완성차업체 포드는 미국에 합작법인 블루오벌SK를 출범시키고 현재 미국 켄터키주와 테네시주에 129GWh 규모의 배터리공장을 설립하고 있다. SK온과 포드는 이 사업에 각각 5조1천억 원씩을 투입하기로 했다.

또 SK온은 최근 포드, 에코프로비엠과 북미에서 전기차배터리 핵심소재인 양극재 생산시설을 구축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SK그룹의 국내 투자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나온다.

일례로 SK하이닉스는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에 4조3천억 원을 들려 새로운 반도체공장을 증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뒀지만 최근 이 계획을 잠정 보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SK그룹은 이와 관련해 2026년까지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에 247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이 가운데 179조 원을 국내에 투자하기로 한 만큼 국내 투자도 차질없이 진행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SK 관계자는 "해외보다 훨씬 규모가 큰 국내 투자가 계획대로 진행돼야 해외 투자도 함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며 "이번에 발표한 대미 투자계획은 물론 이미 확정된 국내 투자 역시 흔들림없이 진행할 것이다"고 말했다. 최영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