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1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40여Km 떨어진 콜론시나의 한 가정집에서 열린 이 집의 가장 장례식 도중 남편을 애타게 찾다 주검으로 다신 만난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햄릿의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인간의 고상한, 또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나타내는 심오한 표현으로 심금을 울린다고 평해지고 있지만, 이 심란한 인간 비극은 실은 플롯과 표현들만 건조하게 따지고 들자면, 그냥 막장 드라마다.
햄릿은 정치극이며, 복수 음모극이며, 모략극이고, 유혈잔혹극이다. 동생은 형을 죽이고, 조카는 삼촌을 죽이고 약혼자의 아버지와 매제를 죽이고, 왕은 신하를 죽이고, 차도살인을 꾀하며 마지막에는 모두 다 죽는다.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TV 연속극으로 옮겼다간, 19금 판정을 피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것이 '고전'이 된 것은 한편으로는 세상이 원래 막장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본질을 적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심금을 울리는, 잘 만든 막장 드라마다.
햄릿의 저 유명한 대사가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실존적 문제'가 된 것은 1950년대 유럽을 휩쓴 실존주의의 재해석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의미는 좀 다르다.
햄릿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의 당시 사회적 문화적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극들은 '민중극'이다. 즉 소수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궁정용 극이 아니라, 시장터에서, 축제에서, 수천 수백의 대중들을 모아놓고 상연한 작품이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문자 그대로 TV 드라마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들로 표현되어 있으며,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소재들이 등장한다. 대중들은, 요즘 막장 드라마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이(요즘의 재벌이나 권력가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는 그들의 권력욕과 도덕성이 얼마나 천박한지 궁금해하며,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극들은 거의 대부분 정치극이며, 내용 또한 험악하기 짝이 없다(도대체 제대로 된 인간들이 없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간과하면, 종종 웃지 못할 오독이 발생한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구혼했다가 거부당하자 햄릿이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햄릿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이나 가버려라, 수녀원(nunnary)에나 가버려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수녀원은 셰익스피어 당대(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는 실은, 창녀촌(brothel)을 뜻하는 대중들의 은어였다(중세 말기, 근대 초기에 수녀원은 실제 이런 용도로 종종 쓰이곤 했다).
그러니까 햄릿의 대사는 오필리어에게 수녀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라, 창녀나 되버려라라는 악담이었던 것이다. 구혼 거절당했다고 이 정도로 나올 지경이면, 요즘의 찌질남 혹은 sore loser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바로 햄릿의 인기의 비결이 있었다. 찌질해서? 음,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햄릿의 대사들은 격조 높은 귀족들의 정서와 교양이 아니라 당시의 관중들, 즉 일반적 대중들이 가질 법한 반응들로 이뤄졌고, 거기에서 대중들은 햄릿과 자신을 '일체화'할 수 있는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극 중에도 햄릿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표현들이 나온다. 즉 그는 출신 성분이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populist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반면 햄릿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자 국왕인 삼촌은 음험한 인물로 묘사된다. 즉 극중에서 이들의 갈등은 단지 개인적인 '원수' 관계가 아니라, 왕과 왕권에 도전하는 대중이라는 정치적 구도를 띄고 있다. to be or not to be는 바로 이런 배경 아래에서 나온다.
유령으로부터 현재 왕위에 올라있는 삼촌이 실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는 얘기를 전해듣고는(이런 소리를 유령한테 듣는다는 것부터가 '루머'임을 뜻한다), 햄릿의 고민이 to be or not to be였다. 이건 실존주의자들의 우아한 고민, 실존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아니라, 왕권을 뒤집어 엎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이었던 것이다.
명분도 있고 대중들의 지지도 있는데 왜 햄릿은 고민하는가? 그는 왕자다. 즉 권력층의 일부다. 만일 그가 대중들의 지지를 등에 엎고 왕을 처단한다면,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왕권 자체를 약화시킬 것이다. 즉 자신의 권력도 동시에 약화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귀족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오필리어와의 갈등은 실은 사랑 문제가 아니라, 잠재적 정치적 대립 속에 놓인 두 인물들 사이의 오락가락이다.
셰익스피어는 그 미친 듯한 사랑으로도 정치는 뛰어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국제적 문제도 있다. 햄릿의 무대는 덴마크 왕실이다. 국왕이 햄릿을 죽이고는 싶지만 자기 손으로 처단하면 대중들이 반발할까 봐 남의 손을 빌려 햄릿을 죽이고자 한다.
그래서 햄릿에게 서한을 주어 영국에 사신으로 보낸다. 그 편지에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사람을 죽여달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햄릿은 중간에 이 편지 내용을 훔쳐보고는 편지 내용을 슬쩍 변조해서 왕이 감시자로 동행시킨 신하들을 영국이 처형하게 만든다.
이 여행길에 햄릿은 노르웨이의 왕자를 만나는데, 그(포틴브라스)는 원정 길에 나선 참이었다("쓸모없는 폴란드 땅을 정복하러 가고 있소". 그 당시에도 폴란드가 쓸모 없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즉 외부의 개입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햄릿은 고민한다. 이걸 뒤집어 엎어? 말어?
그의 고민은 타당했다. 햄릿이 칼을 들자, 국왕 모친 약혼녀 약혼녀 동생 귀족들 그리고 햄릿 자신까지 모두 죽는다. 덴마크는 이제 다스릴 '지배층' 자체가 씨가 말랐다. 그때 폴란드 원정을 떠났던 포틴브라스가 등장하여 왕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연극은 여기서 끝난다. 햄릿이 고민할만 했던 것이다.
즉 to be not to be는 철학적,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결의에 관한 문제였다. 만일 이것이 '혁명'에 관한 문제였다면 to do or not to do라고 하지 왜 to be or not to be라고 했을까?
셰익스피어의 민중극은 왕정 아래에 대중들에게 특별히 허용된 문화행사였다. 역사에서 예술가(광대)는 정치적 면책 특권을 받기는 하지만, 그 한계도 분명했다. 권력층이 보시기에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표현은 은유적이 되고 비틀리며 맴돈다. 17세기 영국에서 대놓고 혁명을 떠들 재간은 없다. 심지어는 18세기에도 이건 불가능했다. 괴테의 '파우스트' 2부는 완성된 뒤에도 발표될 때까지 30여년이 넘게 걸렸다(괴테는 아예 이를 파기해버리려고 했다).
파우스트는 정치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저작이었다. 파우스트가 해방왕국을 세우고(홍길동의 율도국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곳에서 신용화폐를 발행하여 번영을 이룬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걸리는 사안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해방왕국(황제에게 영토를 받아 세운 걸로 슬쩍 타협한다)이 문제였다면, 신용화폐 발행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소설 '파우스트'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은 동명의 중세 말기 연금술사였다. 그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민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실존 인물이다). 당시의 금 통화제도 하에서는 파우스트가 꿈꾸는 순수 신용화폐는, 금을 가진 자산가들이 보기에는 체제 전복 행위에 해당했다.
그런데 이건 단지 괴테의 이상향만은 아니었다. 많은 개혁가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던 유토피아였고, 19세기 초반 프랑스 근대 사상가들이 이를 아예 이론적으로 탐구했다. 그들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영국 탄광회사의 회계사였던 제임스 오웬스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ledger money'라는 화폐 시스템을 고안했다(요즘으로 말하면, 쿠폰 화폐. 유로달러 시스템이 실은 ledger money system이다). 당시에는 이는 '사회주의'라고 비난받았지만, 지금은 최첨단의 자본주의가 꿈꾸는 그리고 실제로 실행하려고 하는(거의 완성단계다) 화폐 제도가 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화폐를 통해 부의 독점을 해소하고 분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문제지,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들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마르크스였다(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생시몽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의 빈곤'이라는 저서를 발표한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이라고 부르면서 이들과 구분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역설은 매우 기묘해서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본가들은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못되서 안달이고(아마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를 이어받은 사람들은 cryto coin 지지자들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거의 다 죽어버렸다.
▲ 헨리 퓌실리의 1791년작 그림 '햄릿과 유령의 대면'으로 제작된 로버트 튜의 동판화 |
햄릿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햄릿은 자신의 존재 조건(왕권 계승자이면서도 동시에 왕에 의해 그 자리를 위협받고, 대신에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 조건과 그의 정치적 비전을 연결해줄 현실성 있는 정치적 전략은 부재했다.
그래서 그는 우유부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모순적 상황의 심연을 들여다 보고 광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의 '개인적' 결함이나 성격 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에게 현실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은 애초부터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개인의 실존 문제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구조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모순된 상황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며, 따라서 햄릿의 not to be를 단지, 미시적인 개인적 고민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실존주의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사르트르의 '출구없는 방').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햄릿처럼 고정된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그런데 현실은 훨씬 열려있고, 계속 유동한다. 이런 현실을 기록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우리는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프레임 안에 둘러싸여 있고, 그 프레임 안에서조차 그것을 기록하는 언어의 특정한 방식에 한계 속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종종, 실제로는 저 우유부단한 햄릿의 절반도 못 되게 스스로를 고민하지조차 못한다.
만일 이 현실을 기록하는 일이, 마치 이미 지나간 역사에서 그 시기의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현실에서도 물어볼 이조차 없는 경우라면 어떨까?
국제 관련 기사를 쓸 때마다, 그리고 그런 뉴스들을 볼 때마다 그 질문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제 뉴스는 주어진 텍스트들만을 가지고 작성한다. 해외의 주요 언론사와 통신사에서 만든 2차 자료들을 기본으로 한다. 특파원이 현지 파견되더라도 사정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이미 오래 뿌리를 내린 사람이 아닌 한, 차라리 외신 기사를 받아서 쓰는 편이 낫다(실제로 한국에서 '특파원'의 역할의 대부분은 그렇게 이뤄진다. 보내나 마나고 가나 마나다).
전쟁 기사의 경우는 특히 어렵다. 전쟁 관련 언론의 최고의 금언은 "전쟁의 첫번째 사상자는 진실"(first causualty of war is the truth)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참여자들은 누구나 다 거짓말을 한다. 전쟁 이전에도 이미 거짓말은 횡행했지만, 특히나 전쟁의 경우에는 닥치는대로 거짓말을 한다. 국제 뉴스를 쓸 때는 반드시 이런 조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얼마나 거짓말을 할까?
지난 5월 말에 우크라이나 인권감시관인 류드밀라 데니소바가 해임되었다. 해임 이유는? 전쟁 개전 직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는 허위 뉴스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이런 류의 뉴스들이 정말 떠들썩하게 지면을 장식했다. 러시아군은 얼마나 잔악한가! 불쌍한 우크라이나 국민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라, 날조된 거짓말이다. 물론 정정 보도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요즘 언론들은 그 정도 양식은 없다. 설사 정정 보도가 나간다 하더라도 이미 굳어진 대중들의 인식을 거의 바꾸지 못한다.
러시아군의 집단 강간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처음부터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아마 필자가 국제면 스트레이트 뉴스 담당자였다면 외신 뉴스가 처음 떴을 때부터 아예 기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례가 있다. 지난 2011년 리비아 전쟁 당시 동일한 집단 강간 뉴스가 있었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부군이 외국 용병들을 고용해 반군 지역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는 것이다. AP발로 처음 보도되었다. 이게 거짓 뉴스라고 밝혀진 것은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한참 뒤였다.
AP 통신은 애매한 정정 기사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집단 강간 사건은 국제적 공분을 불러일으켰으며, 국내적으로는 리비아 각 부족들을 반군편으로 서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류의 뉴스들은 나토가 리비아전쟁에 개입하는데 따른 대중들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정치적 효과를 가진다.
데니소바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했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야지 우리를 지원해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인권감시관은 인권과 미투는 물론, 진실마저도 버렸다.
이 사건에서 흥미로운 점은 왜 갑자기 데니소바가 진실을 고백하고 나섰냐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까지도 온갖 거짓말을 쏟아붓는 우크라이나 의회가 왜 갑자기 이 문제를 들고나와 데니소바를 해임했냐는 것이다. 아마 이 무렵부터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물밑 대화가 오갔을 가능성이 높다. 대화 전제 조건 중의 하나로 러시아가 모략극 중단을 요구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필자는 보차 학살 사건도 믿지 않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목표나 전략을 보면 이 사건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러시아는 자국군의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전쟁 지역의 민간인 보호 정책을 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러시아편으로 돌려세우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미 시리아에서 러시아는 이런 정책으로 큰 효과를 보았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한 교훈을 러시아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점령지 주민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려고 하기보다는 서구 문화로 강제 개종시키려고 했다. 즉 colony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시도는 지역 원주민들에게 정치적 문화적 반발을 야기한다. 특히 토지에 긴박된 원주민들에게는 이는 무장항쟁의 촉발 요인이 된다. 이게 원래 빨치산(partizan)의 기원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전쟁 과정 중에서부터 원주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전투 방식을 수행했다. 정치적 군사적 목표가 colony가 아니라, 차이의 존중에 있는 한, 집단 강간 사건이나 집단 학살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개인적인 일탈을 있을 수 있어도).
언론의 입장에서는 이런 문제는 간단치 않다. 설사 이제까지의 전례로 보아, 이런 사건들이 모략극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정부가 공공연하게 대놓고 이런 발표를 하면 과연 이를 뉴스로 옮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즉 지면에 한계가 있던 종이 신문 시절에는 이를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방식들이 있었다. 편집자가 이런 류의 기사를 그 진실성이 애초부터 의심스럽도록 의도적인 배치(또는 의도적인 제목 달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술도 이제는 사라졌고, 인터넷 언론의 시기에는 편집의 묘미도 사라졌고, 게다가 포탈이 편집권을 가진 상태에서는 아예 언론사에 그런 권한조차도 없다. 국가가 뻔한 거짓말을 할 때, 그런데 당장 검증은 불가능할 때, 그것을 보도해야 하는가?
언론들은 단순히, "정부에 따르면"이라는 인용으로 그 함정을 피해가려고 한다. 그러나 문장의 효과는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인 언론이라면, 그것이 거짓일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러나 외신 기사처럼 2차 자료 이외에는 아예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더 막막하다.
물론 현실 기사는 더욱 끔찍하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집단 강간' 발표는 한국 언론에 실릴 때는 기자 개인의 '감정'이 들어간다. 마치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짓을 한 것처럼 뉘앙스가, 어떤 때는 아예 노골적인 표현이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기자의 직업 윤리, 아니 상도의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모두가 다 그런 식이라면, 그게 상도의든 뭐든 문제가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지 꽤 됐다.
선전전(또는 심리전. 이것 역시 엄연히 전쟁의 일부분이다. 즉 전투행위다)을 수행하는 쪽에서는 아예 이같은 언론의 상태 또는 사회적 조건들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펼친다. 심지어는 그 과정이 교묘할 필요조차도 없다. 언론의 동물적 본능에 따라서, 먹이를 던져주면 그냥 달려든다. 언론들이 본능적일수록 작전은 더욱 단순해지고 노골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거짓말도 동원된다. 류드밀라 데니소바.
▲ 6월10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의 숲속에 파괴된 러시아군의 전차와 장갑차들이 방치돼 있다. <연합뉴스> |
최근 뉴스들을 보자. 며칠 전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지뢰를 살포하여 민간인 사상이 우려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UN 인권고등사무국이 묘한 발표를 했다. 지난 3월11일 우크라이나 남부 스타라 크라스니안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희생된 민간인에 관한 발표를 했다. 러시아군이 진공해오자 우크라이나 군은 이 지역 요양원에 작전 본부를 세우고 진을 쳤다. 양측의 교전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노인 등 50여 명이 사망했다. 민간인 거주 구역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은 전쟁법 위반이다.
그런 지역에 군대 배치시에는 반드시 민간인들을 소개(evacuation)시켜야 한다. 소개는 위험 지역에서 피난, 대피시킨다는 뜻이다. 지난 5월 아조프 제철소에 포위되어 있던 Azof Battalion이 러시아군에 투항했을 때, 우크라이나 정부는 'evacuate'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서구 언론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 표현을 받아썼다. 아니다. 이들은 항복해서 러시아군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건 surrender지, evacurtion이 아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AP, 가디언, 블룸버그통신 모두 evacuate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부터는 언론이 아니다.
어쨌든 우크라이나 군은 스타라 크라스니안카 요양원에 진을 치면서 민간인을 피난시키지 않았다. 요양원 직원들과 가족들은 환자들을 대피시키기를 원했지만, 불가능했다. "도처에 지뢰가 깔려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민간인을 대피시키지 않고 군대를 배치하는 것도 전쟁법 위반이며, 그런 지역을 공격하여 민간인을 사상케하는 것도 전쟁법 위반이다(UN 보고서는 이 사건을 전쟁 범죄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가 민간인들이 오도가도 못하게 지뢰를 뿌렸을까? 공격하는 측이 지뢰를 뿌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작전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채널에 가보면, 우크라이나 군 표식이 선명한 헬리콥터들이 대량으로 대인지뢰를 살포하는 영상들이 수두룩하다. 개전 초기 러시아 군이 키에프까지 진격하자 우크라이나 군은 놀라서 닥치는대로 지뢰를 뿌려댔다.
왜 우크라이나 정부가 갑자기 지뢰 문제를 들고 나오나 처음에는 의아했다가 UN 보고서을 보고서 이해가 갔다. 민간인 사상자 관련은 양쪽에 모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지뢰는 떠넘기기가 가능하다. 이걸 언론 용어로 사전에 물타기한다고 한다. 어떤 뉴스가 나올 것으로 사전에 인지하고 있을 때, 그 뉴스의 충격을 완화하거나 혹은 해석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뜸들이기 기사를 내는 것이다.
선전전은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다. UN 보고서를 보면 한가지는 확실하다. 'human shield', 즉 민간인을 방패로 한 우크라이나군의 작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전 물타기는 좀 더 고도의 정치적 목적에서도 동원된다. 지난 12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이란이 러시아에 군용 드론 수백기를 수출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있다"는 공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희한했다. 무엇보다도 이란은 그런 능력이 없다. 이란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드론 개발에 열을 올리기는 하는데, 수백기씩 생산해 수출할 능력은 없다. 게다가 드론 관련 군사 기술은 러시아가 월등하다.
그럼 왜 이런 발언이 나왔을까? 설리반 발언 반나절 뒤에 외신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7월 19일 이란 테헤란을 방문한다는 보도가 떴다. 어차피 바이든 정권은 중동 산유국들을 달래기 위해 이란과 핵협상을 파기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 기회에 러시아와 이란을 묶어서 떨이로 처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푸틴의 방문에는 다른 외국 정상도 하나 더 참석한다. 터키의 에르도간 대통령이 참석하기로 했다. 이건 좀 흥미롭다. 이들은 시리아 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을 열 예정을 잡았다. 이건 미국에는 위협이 된다. 지금 미국은 IS 격퇴를 명분으로 시리아의 약 20%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 근데 이건 왜 아무도 '침략'이라고 안부르지? 아무도 미군을 요청한 적이 없는데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침략인 것처럼, 미국의 시리아 침략도 침략이다. 서구 어느 언론도 이제는 이 정도 사고조차도 못한다.
물론 설리번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정보'가 있다고만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정보'의 유용한 사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 생화학 무기가 있다는 정보로 전쟁을 개시한 2003년도 사례를 생각해 보면 된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아니면 말고'로 끝난다. 이미 목적은 달성되었다.
이런 식의 '선전'은 미국의 특징적 전술이기도 하다(미국의 군사전략의 두 가지 특징 중의 하나다. 다른 하나는 뒤끝이다). 지난 3월 우크라이나전 초기에 설리번 보좌관과 블링켄 국무장관은 러시아가 중국에 무기 수출을 요청했다면서 중국에게 러시아를 군사지원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바 있다. 중국은 그런 요청 받은 바 없다면서 펄쩍 뛰었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된다. 러시아 무기의 최대 수입국이 중국이다. 무기로 따지자면 러시아는 중국에 비해 한참 선진국이다.
그래서 서방 언론에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떴다; "중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잔혹한 전쟁에 무기를 제공하는데 관심이 없다"(MSN, 3월 14일자),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속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뉴스위크, 3월 17일자). "중국은 모스크바를 지원하는 무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가디언, 3월 21일).
요청받은 바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데, 갑자기 지원하지 말라고 요구하더니 사실이 아니라고 하니까 마치 중국이 미국의 압력으로 러시아 지원을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발언들과 보도들이 쏟아진다. 이런 것이 선전전이다. 왜냐하면 이런 이슈들은 검증이 안된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태를 어떻게 입증하란 말인가? 법학적으로 말하자면, '부존재 증명'과 같은 것이다("네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라").
여기에 프레임이 겹쳐지면 더욱 심각하다. 많은 언론들이 전쟁 당사자인 러시아나 우크라이나가 아닌 제 3국(주로 서구)의 언론이면 '객관성'을 확보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전쟁은 국제전이며, 대리전이다. 러시아와 NATO가 싸우는 전쟁이다.
지난 6월 11일, 램슈타인 포맷(독일에 있는 미 공군기지, NATO 주둔 미군기지 본부) 책임자의 발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우리가 훈련시켰고 우리가 무장시켰으며, 우리가 지휘한다". 우크라이나군은 독자적인 작전 수행 권한조차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은 제3자가 아니라, 당사자다. 따라서 이들의 발언은 기본적으로 '거짓'이다.
현황을 알 수 없는 전쟁의 상황은 고사하고라도 너무나도 간단히 확인 가능한 정치적 사실조차도 무시된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마치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원유 수출을 중단/제한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아니다. 러시아는 지금까지도 적어도 천연가스와 원유에 관한 한, 금수조치를 취한 적이 없다. 러시아는 단지 천연가스의 경우, 국영회사인 로즈프롬에 유로화(또는 달러화) 계좌와 루블화 계좌를 개설하고 천연가스 대금을 계약서상의 통화로 수입자가 대금을 지불하면 그것을 모스크바 증시에서 루블로 환전해 루블 계좌로 입금하여 정산을 마치도록 규정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는 러시아가 미국과 EU의 금융 규제를 피하기 위해 마련한 편법이다.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출이 감소한 것은 EU 국가들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사지 않겠다고(또는 루블화 결제 방법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거부한 탓이다.
최근에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량이 감소한 것은 노스스트림 1 송유관에서 가스를 퍼올리는 터빈의 수리를 담당하고 있는 독일회사 지멘스에서 터빈 수리를 캐나다에 맡겼다가 캐나다가 터빈이 대러 규제 해당 품목이라며 지멘스에 돌려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기술적으로는 터빈이 돌아오지 않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도리는 없다.
그런데 왜 이런 거짓이 통하는가? 일차적으로는 수십년간 쌓아온 미국의 대외 선전 하부구조들을 간과할 수 없다. 전직 CIA 고위 간부에 따르면, "각국의 수도에 CIA가 운영하는 언론사가 하나씩은 꼭 있다". 하나밖에 없을 리가. 게다가 뉴스위크의 보도에 따르면, CIA가 움직일 수 있는 선전일꾼들은 세계적으로 6만 명에 이른다(한국식으로 말하면 댓글부대가 6만이다).
뿐만 아니라, 언론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주류에 속한다. 즉, 그 사회에서 지배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의식과 세계관에 동조하며 그들과 이해를 같이한다. CIA의 언론 공작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그 사회 자체가 미국의 이해 관계에 동조화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별 언론사나 언론인에 대한 공작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일의 시사지 '슈피겔'의 전 편집장은 퇴임 후에 CIA의 프락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뉴스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않았다.
2차 자료로밖에 사태를 확인할 수 없는 국제 뉴스 담당자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지난 십 여년간의 경험으로 본다면, 거의 모든 서구 언론은 신뢰할 수 없다(특히 제국의 대외적 이해가 걸린 사안에서는). 매우 진지한 의미에서 신뢰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언론도 신뢰할 수 없다. 당사자들 정부는 더 믿을 수 없다.
어디에서 이미 죽은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찾아서는 또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진실은 발견해봤자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가 된지 오래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은 파국이더라도, 햄릿은 자신의 to be or not to be를 같이 들어주고 공감해 줄 관객들은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고민하지 않으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요즘 온라인상의 뒤틀린 경구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 고로 존재한다. 이제 다 지나간 뒤에야, 다 늙은 다음에야, 언론의 본령을 깨닫다니. 놀라워라. 이공순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