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 앞에서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시민단체 구성원들. <연합뉴스>
이에 도서국가들은 이번 청문회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이 큰 주요국들이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서 UN기후총회에서 주요국들이 기후변화 대응 의무를 회피한 것을 두고 향후 있을 국제회의에서 이같은 실패를 피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2일(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기후변화에 국가별 법적 책임을 판단하는 심리 절차가 시작됐다.
이는 지난해 3월 유엔총회에서 결의된 사안에 따른 절차다. 당시 바누아투를 비롯한 도서국가들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에 따라 국가별로 기후변화에 져야 하는 책임을 판단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심리 절차는 공개 청문회 형태로 오는 13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며 국제기관 12곳과 98개국 대표가 참석해 국제사법재판소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다.
국가별 기후변화와 관련해 책임을 얼마나 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인 만큼 치열한 공방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로이터에 따르면 청문회 개막 당일 남태평양 도서국가 바누아투 정부는 도서국들을 대표해 기후변화 책임이 세계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부 국가들에 있다고 주장했다.
랄프 레게바누 바누아투 기후특사는 공식성명을 통해 "기후위기를 유발한 책임은 소수의 국가들에 있다"며 "이들은 온실가스 대부분을 배출했지만 그 피해는 가장 적게 받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도서국들)는 우리가 일으키지 않은 위기의 최전선에 설 것을 강요받고 있다"며 "주요 온실가스 배출국들은 과학자들의 갈수록 강해지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부터 배출량을 도리어 50% 가량 늘렸다"고 지적했다.
바누아투가 청문회 초기부터 주요국들을 비판하며 강도 높은 발언을 한 이유는 지난달 있었던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평가된다.
COP29에서 도서국들을 포함한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들이 온실가스 배출에 큰 책임이 있는 점을 들어 기후대응을 위해 필요한 연 1조3천억 달러(약 1824조 원) 규모 기후재원 마련을 요구했다.
이에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선진국들은 기후재원 의무를 현재 온실가스 배출량이 큰 인도와 중국 등 선진국 이외의 부국들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책임을 회피하고 논의를 지연시켰다.
그 결과 COP29 합의문은 필요한 재원보다 한참 모자란 연 3천억 달러(약 420조 원) 규모 지원을 약속하는 것에 그쳤다.
도서국들은 이번 청문회를 통해 주요국들이 기후변화에 갖는 법적 책임을 확실히 해 향후 기후총회에서 관련 논의를 무산시키려는 행위를 막고자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청문회에 맞춰 환경단체와 도서국 원주민단체 등 여러 시민단체들도 주요국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란 킬로네 도서국가 원주민단체 '멜라네시아 스피어헤드 그룹' 법률 고문은 가디언을 통해 "가장 가혹한 현실은 우리 원주민 커뮤니티 가운데 대다수가 앞으로 기후변화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라며 "몇몇 확실한 책임이 있는 국가들이 일으킨 기후위기는 각국의 생존권과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공개청문회에 참석한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들. <연합뉴스>
다닐로 가리도 그린피스 법률 고문은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사법재판소의 법적 권고는 국가의 국제적 의무를 명확히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의무 위반에 따라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명확히 할 것"이라며 "여기에는 기후피해에 대한 보상, 과학에 기반해 안전 기준치를 초과한 온실가스 배출을 즉시 중단하는 해결책 수립 등이 포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막 당일 각국 대표들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과 파리협정에서 규정된 것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각국에 물을 수 있는지 여부를 놓고 다퉜다. 파리협정은 2015년 세계 각국이 글로벌 기온상승을 1.5도 아래로 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의한 조약을 말한다.
이에 독일과 사우디아라비아 대표들은 각국 정부는 파리협정에서 규정된 것 이상으로 기후변화 해결을 위해 노력할 의무를 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비브케 뤼케르트 국제사법재판소 독일 국제공법 국장은 "파리협정은 법적 의무와 비법적 약속 사이에서 신중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침해하려는 시도는 각국의 참여 의지를 심각하게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대표단은 같은 날 공식성명을 통해 각국이 기후변화와 관련해 지고 있는 의무는 이미 파리협정을 통해 명확히 규정돼 있어 추가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발표했다.
잘라위 투르키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대표도 "기후변화에 관한 전문 조약체제에 포함된 의무나 결과를 넘어서거나 충돌하는 의무 또는 필요사항을 부여하는 것은 이같은 체제의 완전성을 훼손하고 향후 진전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 대표단도 가까운 시일 내로 이와 비슷한 입장을 내세운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주요국들 입장 발표에 도서국들은 즉각 반박에 나섰다.
카리브해 도서국가 앤티카바부다의 자카리 필립스 법무장관 자문은 "파리협정은 기후피해 방지 의무를 포함한 국제관습법 준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맞다"며 "다만 그것이 꼭 파리협정이 피해 방지를 위해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