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길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일행이 2018년 7월 방문한 나진항 3호 부두의 모습. <북방경제협력위원회>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지린(길림)과 조선 함경북도 회령을 연결하는 길회선 종점 항구(종단항) 건설 과정에서 나진에 '황금비'가 내렸던 일은 한국사 최초의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꼽힌다.
1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공항, 산업단지 등의 개발이 진행되면 연이어 인근 지역에 부동산 투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11월27일 GS건설 등 7개 사로 구성된 ‘인천신항스마트물류단지’와 인천신항 배후단지 1-1단계 3구역, 1-2단계 개발을 위한 실시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사업은 총 94만1천㎡ 규모에 복합물류시설, 업무·편의시설, 녹지 및 도로 등 공공시설이 조성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인천신항 관련 개발사업들을 놓고 일각에서 부동산 투기 우려를 제기한다.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2024년 5월20일 성명을 통해 "정부는 인천 신항 배후단지 민간개발 중단하고 자유무역지역을 확대하라"며 “조성 토지 소유주의 부동산 투기‧난개발이 우려되는 항만 사유화(민영화)의 서막이 오른듯하다”라며 “이에 신항 배후단지 민간사업은 조속히 공공개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2공항 건설 과정에서도 부동산 투기 의혹이 나오고 있다.
제주참여환경연대는 10월29일 국토교통부 고시에 나온 제주 제2공항 건설 부지의 토지소유 실태 분석 결과를 발표하며 "제2공항 사업 예정 부지에 포함된 토지를 전수조사한 결과 기획부동산 개입 및 토지 쪼개기 등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도내 거주자가 소유한 필지는 1263필지, 도외 거주자가 소유한 필지는 889필지로 일견 도내 거주가 소유 필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필지 취득 당시의 주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도외 거주 필지 소유자가 1270명으로 전체 60%를 차지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과 관련해서 김건희 여사 일가의 부동산 투기 의혹은 여야의 주요 격전지였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10월7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건희 일가는 축산업을 하는 사람들의 아닌데 사업계획변경을 앞두고 해당 토지에서 갑작스럽게 흑염소와 칠면조를 키우기 시작했다"며 "이것은 부동산 투기 전문가인 이들이 보상금을 더 챙기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부동산 투기 논란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있었던 나진 땅바람 사건이 눈에 들어온다.
나진 땅바람 사건은 중국 지린(길림)과 조선 함경북도 회령을 연결하는 대륙철도 길회선의 종단항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한반도 최초의 부동산 투기 소동이다.
▲ 구글어스를 통해 살펴본 나진항의 위치. <구글어스>
청진은 풍부한 자원과 탁월한 지리 조건 등을 기반으로 성장이 시작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웅기 또한 강제 병합 이래 군항 목적으로 개발되는 등 일제가 공을 들인 도시였다. 반면 나진은 오고 가는 길이 험하고 사람도 그다지 살지 않는 지역이라 개발 가능성이 매우 적어 보였다.
다만 나진에 청진과 웅기에는 없는 장점이 있었으니 바로 해안이 넓고 물살이 약해 항구로서 천혜의 지리 조건을 갖췄다는 점이었다. 청진과 웅기는 비록 이미 항구로 사용되고 있긴 했으나 해안이 좁고 물살이 세다는 단점이 있었다.
동아일보의 1932년 11월13일 ‘최단항 나진 답사기’를 보면 항구로 적합한 조건을 지닌 나진 일대의 풍경이 묘사돼 있다.
당시 최용환 특파원은 나진을 방문한 뒤 “시야에 들어오는 나진만은 관동령의 비탈이 낮아짐에 따라 해안이 넓어진다”며 “대초도와 소초도가 바깥 바다의 파도를 가로막고 있어 바다라기보다는 잔잔한 호수 같다”라고 말했다.
김기덕 역시 1925년 나진에 방문한 뒤 바로 항구로서 나진의 잠재력을 눈치챘다. 땅이 좁다는 나진의 단점까지 파악한 김기덕은 비록 종단항은 나진으로 결정되겠지만 인근에 위치한 웅기 또한 나진 개발의 혜택을 볼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진에 땅바람이 불어닥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인 1932년의 일이다.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 총독은 1932년 8월23일 나진이 길회선 종단항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인구가 약 100명에 불과하던 조용한 어촌은 순식간에 투기꾼들의 천국이 됐다. 3.3㎡에 1~2전 하던 나진의 땅값은 한 달 뒤 20~40원으로 치솟았다. 1원이 100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을 고려하면 1천 배 가까이 땅값이 오른 셈이다.
다만 나진에 불어 닥친 땅바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길회선 공사를 맡은 남만주철도는 같은 해 11월 항만과 시가지 부지를 종단항 결정 이전 가격으로 수용하겠다는 결정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1935년에 진행된 실제 수용과정에서는 원안보다 약간 인상된 가격으로 토지를 수용하는 것으로 최종 타결되면서 나진 땅바람은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토지 투기 열풍은 한반도의 중심지인 경성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주택 개발지로 지정됐던 명수대(지금의 서울 동작구 흑석동) 일대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주택 개발이 이뤄졌다.
일제가 중국과의 전쟁을 일으킨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부 조선 사람들이 현금을 부동산으로 만들기 위해 명수대 지역을 찾았고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이어졌다.
1939년 3월8일 조선일보 기사는 당시 명수대의 모습을 “풍광이 맑고 아름다워 경성의 이상적인 주택지로 평가가 높아져서 1931년까지도 50호가 살던 지역이 지금은 문화주택, 별장 등으로 형태가 정연해 650호에 인구 3500명에 이르니 이 지대를 목표로 해서 모여드는 사람이 날로 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에서 토지 투기 열풍이 심각해지자 조선총독부는 토지 구입용 자금의 대출을 막기도 했다. 주택 구입 목적의 주택담보대출을 중단한 최근의 대한민국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는 1940년 4월27일 사설을 통해 “조선의 광업 인기가 식게 되면서 농경지, 도시 근교 주택지, 임야지에 관심이 몰리며 토지경기가 문자 그대로 황금시대를 이뤘다”면서 “최근에 와서 자금조정법을 강화하면서 각 금융기관들이 토지자금 대출을 전면적으로 중지함에 따라 이러한 현상이 가라앉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한다.
이어 “토지경기가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투기적 성격에 지배됐던 만큼 앞으로 건전화가 진행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