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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수요 감소에 대응해 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가운데도 관련 수요의 필연적 성장세에 대한 확신을 갖고 공격적 투자를 유지해왔다.
정 회장은 이같은 뚝심 경영을 통해 확보한 생산능력과 전기차 라인업을 바탕으로 중장기 전기차 판매 목표의 차질 없는 달성에 나서며, 전기차 시대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0일 세계 권역별 전기차 판매 통계를 종합하면 올해 1~7월 유럽(유럽연합+유럽자유무역연합+영국) 전기차 판매량은 109만3808대로 전년 동기보다 0.6%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23년 1~7월 전년 대비 유럽 전기차 판매 성장률은 62.4%였다.
미국에서도 올 상반기 전기차 판매 증가율은 7.3%에 머물러, 작년 상반기 47%와 비교해 크게 뒷걸음쳤다.
한국에선 가장 심각한 전기차 시장 둔화가 관측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전기차 판매량은 16만2593대로 2022년보다 1.1% 줄며 세계 주요 자동차 시장 가운데 유일하게 역성장을 기록했다. 올 상반기엔 전년 동기보다 전기차 판매량이 16.5% 줄며, 판매 감소세가 더 뚜렷해졌다.
글로벌 전기차 전환 추세에 제동이 걸리자 주요 완성차 업체들은 최근 일제히 기존에 세웠던 전기차 로드맵 수정에 나섰다.
스웨덴 볼보는 지난 4일 2030년까지 판매하는 모든 차량을 순수 전기차(BEV)로 전환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대신 2030년 판매량의 90~100%를 전기차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로 채우기로 했다.
일본 도요타도 작년 5월 발표한 2026년까지 연간 150만 대의 전기차를 판매하겠다는 목표를 최근 100만 대로 낮춰잡았다.
독일 메르세데스-벤츠는 올해 들어 2030년까지 모든 차량 100% 전기차로 판매하겠다는 기존 계획을 50% 수준으로 대폭 수정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지난 7월 2025년 연간 전기차 100만 대 판매 목표를 철회했다. 앞서 지난해엔 전기픽업 생산 공장 가동 시점을 1년 이상 연기하기로 했고, 올 6월엔 전기차 생산과 판매 목표를 하향 조정했다.
포드는 최근 3열 전기 SUV 생산 계획을 취소하고, 전기차 생산에 투입하려던 연간 자본지출 비중도 축소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반면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 들어서도 기존에 세운 2030년 전기차 판매 목표를 유지했다.
현대차는 최근 CEO 인베스터데이(CID)에서 2030년 글로벌 시장에서 전기차 200만 대를 판매해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약 36%를 채우겠다고 밝혔다.
기아는 지난 4월 2030년 세계 시장 전기차 판매 목표를 160만 대, 판매 비중을 38%로 제시했다.
정 회장은 지난해 11월 울산 전기차 전용 공장 기공식 행사에서 전기차 수요가 줄어드는데도 공격적 투자를 지속하는 이유를 묻자 "큰 틀에서 어차피 전기차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운영의 묘를 살려 해볼 생각"이라고 답했다
글로벌 전기차 수요에 관한 일시적 이슈보다 장기적 전기차 수요 확대에 대한 확신을 갖고 계획된 투자를 그대로 밀어붙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현대차그룹은 이같은 정 회장 판단 아래 연산 30만 대 규모의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공장(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HMGMA)과 울산 전기차 전용 공장 가동 시점을 예정보다 앞당기고, 전기차 신차 출시 일정도 계획대로 진행키로 했다.
다만 현대차는 2026년 전기차 판매 중간 목표를 지난해 세운 2026년까지 94만 대(비중 18%)에서 올해 2027년까지 84만1천 대(비중 17%)로 낮춰잡았다.
하지만 그룹 차원에서 보면 올해 발표한 전기차 판매 목표가 2027년 현대차·기아 합산 198만8천 대로, 지난해 세운 2026년 194만 대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기아가 작년 2026년 100만 대로 잡았던 전기차 판매 목표치를 올해 2027년 114만7천 대로 소폭 높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기차 전환기 현대차와 기아의 일종의 역할 분담이 반영된 계획으로 해석된다.
정 회장은 뚝심 투자로 확보한 전기차 생산능력과 다양한 전기차 라인업을 바탕으로 2030년 전기차 판매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전기차 시대 '퍼스트 무버'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2030년 목표를 향한 여정에서 현대차는 하이브리드 쪽에, 기아는 전기차 쪽에 방점을 찍은 전략을 추진한다.
현대차는 최근 하이브리드차를 기존 7차종에서 14차종으로 확대할 계획을 밝혔다. 특히 기존에 하이브리드 모델이 없었던 제네시스 브랜드에서 5종의 하이브리드 신차를 출시하겠다는 방침을 처음 공식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이브리드차 판매량을 대폭 늘려 2028년에는 지난해 세운 글로벌 판매 계획과 비교해 40% 증가한 133만 대의 하이브리드차를 판매하겠다는 목표를 새로 제시했다.
하이브리드 신차 출시에 집중하면서 빠질 수 있는 전기차 판매량은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출시로 만회한다.
EREV는 전기차와 같이 전기로 바퀴를 굴리지만 내연기관 엔진이 전기를 생산해 배터리 충전을 지원하는 차량이다. 업계에선 엔진이 발전기 역할에만 국한되고, 동력은 전기모터에서만 발생하는 만큼 EREV를 하이브리드차가 아닌 전기차로 분류한다.
현대차는 주유와 충전을 동시에 하는 EREV는 1회 충전으로 900km 이상 주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차는 2026년 말 북미와 중국에서 EREV 양산을 시작해 2027년 본격 판매할 계획을 세웠다. 목표 판매량은 각각 연간 8만 대, 3만 대다.
정 회장이 신규 파워트레인에 관한 선제적 투자를 지속해온 결과, 현대차는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내연기관, 하이브리드, 전기차, 수소전기차 등 모든 동력원의 차종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기아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높은 상품성을 갖춘 보급형 전기차 모델을 잇달아 출시하며, 글로벌 전기차 캐즘 정면 돌파에 나선다.
기아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 둔화가 지속되는 가운데도 최근 국내 출시한 EV3를 시작으로 한국·북미·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EV2, EV4, EV5 등 총 6종의 전기차를 출시한다. 이들 전기차 대중화 모델 판매량을 올해 13만1천 대에서 2026년 58만7천 대로 4배 넘게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전동화 수요 회복이 예상되는 2030년까지 EREV를 비롯해 점진적으로 전기차 모델을 확대할 것"이라며 "소비자에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며, 전기차 시대에 시장을 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