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이재명 정부가 물가를 잡기 위해 '물가 책임제'를 다시 테이블에 올렸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으면서 수입물가가 상승하는 데다 생활물가 고공행진이 겹치면서 정부는 품목별 물가 대응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 정상화가 쉽지 않고, 행정적 가격 통제의 한계가 뚜렷해 성과를 낼 수 있을지 회의론이 나온다.  
 
정부 차관급 '물가안정 책임관' 지정 채비, '행정적 가격 통제'의 한계 넘어설까

▲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가 2일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7.20(2020년=100)으로 1년 전보다 2.4% 올랐다. <연합뉴스>


23일 정부 움직임을 종합하면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 차관을 '물가안정 책임관'으로 지정해 소관 품목의 가격과 수급을 직접 책임지고 점검·관리하는 이른바 '물가 책임제' 시행을 준비하고 있다. 농·축산물과 가공식품은 농림축산식품부가, 수산물은 해양수산부가, 석유류는 산업통상부가 각각 담당하는 방식이다. 소비자 물가를 구성하는 458개 전 품목을 대상으로 삼는 방안까지 거론할 만큼 위기 인식이 강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재부 관계자는 이날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물가안정 책임관을 지정해 소관 품목의 물가를 점검 및 관리하는 '물가책임제' 진행을 준비하고 있다"며 "부처별로 차관급으로 10여 명을 물가책임관으로 지정하려 한다"고 밝혔다.

앞서 기재부는 지난 11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부처별로 차관급들이 물가안정책임관으로서 농·축·수산물과 가공식품 등 소관 품목들의 관리를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에 현재 구체적 방안을 빠르게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물가 책임제를 재가동하려는 배경에는 최근 물가 흐름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다. 지난달 소비자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2.4% 상승해 두 달 연속 올해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자주 구매하는 품목 위주로 구성돼 체감물가에 가까운 생활물가지수는 2.9% 오르면서 1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나타냈다.

특히 최근 원화 가치 하락으로 수입 물가가 오르는 게 부담이다. 지난 11월 수입물가지수는 전달보다 2.6% 오르며 지난해 4월(3.8%) 이후 1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지난달 국제유가는 하락했지만 환율 영향으로 국내 석유류 가격은 전년보다 5.9% 올랐다. 

정부가 품목별 관리라는 강수를 도입하는 배경에는 구조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정 품목에 한정해 관리하면 물가 상승 압력을 제어하기 어렵고 가격 상승이 다른 품목으로 전이되는 '풍선 효과'도 생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부처별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수급 이상이나 가격 급등 조짐을 조기에 포착해 대응하겠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물가와 관련해 의 발언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

이 대통령은 4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최근 체감물가가 높아지며 민생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물가안정이 곧 민생 안정"이라며 "관계 부처들은 주요 민생 품목의 수급 상황을 면밀히 점검하고 물가안정을 위한 정책 수단을 선제적으로 동원해달라"고 주문했다.

품목별 책임제를 도입한 것은 이재명 정부가 처음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 때인 2023년 11월에 각 부처 차관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지정했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에는 담당 공무원의 이름을 걸고 관리하는 '물가 관리 책임실명제'까지 도입해 '배추 국장' 등의 별칭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좋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관리 대상에 포함됐던 주요 품목들의 가격은 제도 시행 이후 오히려 전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웃돌며 더 빠르게 올랐다. 이에 가격 상승 압력을 행정적으로 억누르는 방식이 시장의 왜곡을 키웠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당시 업계는 원가 부담이 누적된 상황에서 가격 조정이 제한되자 인상 시점을 미루다가 한꺼번에 가격을 올리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단기적인 가격 안정 효과는 나타났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가격 변동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정부 차관급 '물가안정 책임관' 지정 채비, '행정적 가격 통제'의 한계 넘어설까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8월12일 오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부부 동반 만찬을 하며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정부도 2023년 물가 불안 국면에서 범부처 차원의 물가 관리 체계를 가동하며 유사한 접근을 시도했다. 당시에도 국제 원자재 가격과 환율 변동 등 대외 요인이 물가를 좌우하는 비중이 컸고 부처별 관리와 점검만으로는 상승 압력을 상쇄하기 어려웠다는 평가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강한 가격 관리 신호가 오히려 이런 우회적 인상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시장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지나치게 압박할 경우 기업들이 다른 방식으로 비용 부담을 전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부담을 떠넘기는 '꼼수 인상'으로는 이른바 '슈링크플레이션'과 '스킴플레이션'이 대표적이다. 슈링크플레이션이란 상품 크기나 용량을 줄이는 것이며, 스킴플레이션은 재료나 서비스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이와 함께 확장적 재정 운용이라는 한계도 지적을 받는다. 보통 확장재정은 물가를 밀어올리기 쉽다. 이에 물가 안정과 경기 진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이준상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와 이형석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등이 5월 낸 '재정건전성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 논문을 보면 정부 부채가 1.0% 증가했을 때 소비자물가지수는 최대 0.15%까지 상승한다. 실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7월부터 1·2차 추가경정예산안(33조8천억 원)을 편성했을 때 전체적인 물가 상승률이 2% 안팎을 오갔다.

이들은 논문에서 "재정당국은 재정정책과 재정건전성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음을 고려해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며 "재정건전성 개선이 물가 안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치권에서도 국민의힘은 이재명 정부의 확장재정 기조를 비판하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야당 간사인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이 대통령의 '묻지마' 확장재정 탓에 원화 가치가 폭락해 국제유가는 하락해도 우리나라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온갖 원자재 물가도 다 올랐다"며 "이 대통령의 눈에는 망가지는 대한민국 경제와 우리 아이들 어깨에 잔뜩 지워진 빚더미가 안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그럼에도 정부의 확장재정 기조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내각의 입장이 확고하다.

이 대통령은 지난 11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재부 업무보고에서 "지금 (경제) 상태는 너무 바닥이고 (경제성장률이) 계속 하향 곡선이기 때문에 바닥을 찍고 반등하고 우상향으로 커브를 그리려면 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확장재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같은 자리에서 "적극적 재정 정책과 소비·투자·수출 부문별 대책으로 1.8% 플러스알파(+α) 성장을 뒷받침하겠다"며 "외환과 부동산 시장은 상시 점검 체계를 통해 철저히 관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