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석상옥 네이버랩스 대표이사, 채선주 네이버 대외/ESG 정책 대표, 아흐메드 알 조하니 DMS CEO, 칼리드 알호가일 SAPTCO CEO, 한상영 네이버클라우드 글로벌DX&이노베이션 부문장이 2024년 3월6일 사우디아라비아 현지에서 지능형 교통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네이버>
채선주 네이버 대외·ESG정책 대표 겸 네이버아라비아 대표다. 서둘러 안부 문자를 보냈다.
'중동 쪽 하늘 길이 막히고 있다는데, 현지에 발 묶여 있는 거 아닌가요?'
곧 답이 왔다.
'저는 다행히 한국입니다. 이번 주말에 다시 (중동 현지로) 들어가고요.'
'다들 빠져나오고 있는데, 거꾸로 다시 들어간다고요? 항공편도 다 끊겼다고 하던데.'
'중동 하늘 길은 끊기고, 아래 터키를 통해 들어가는 길은 열려 있어서. 영국 런던을 통해 들어가는 것도 보고 있구요. 정부 일 하고, 국가 인프라 서비스 만든다면서 (전쟁과 하늘길 핑계로) 안 들어가는 것도 이상해서. 이참에 들어가서 더 신뢰를 다지려 합니다."
'참 독하십니다'라고 보내려다 참았다.
대신 '혹시 이해진 의장(네이버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이 잡지 않느냐'고 물었다.
'ㅎㅎ 그렇잖아도 지난 주말 연락주셨어요. 무리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가고 싶습니다."
'굳이 왜?'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농담을 건넸다.
'(이번에 갔다가) 별일 없이 귀국하시면, 제가 생환 기념으로 막걸리 쏘겠습니다.'
'중동 전쟁' 상황은 갈수록 더 악화하고 있고, 그 지역 하늘 길은 더 좁아지고 있다. 정부가 현지 교민과 관광객을 육로를 통해 인접 나라로 피난시킨 뒤 귀국시키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정부는 중동 전쟁 영향권에 놓인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오만, 바레인, 요르단,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7개국에 특별여행주의보(2.5단계)를 발령했다. 채 대표가 예정대로 사우디로 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졌다.
다만, 다들 도망가는 상황에서 거꾸로 되돌아가 '신뢰를 다지려 한다'는 그의 의지가 비상해 보였다. 특히 '정부 일을 하고, 인프라 서비스를 만든다면서, 안 들어가는 것도 이상해서'라는 말의 무게감도 컸다.
네이버 현지 법인(네이버 아라비아)에 일을 맡긴 현지 정부 당국자 쪽에서 보면, 다들 도망가는 상황에서 채 대표가 거꾸로 되돌아와 자리를 지켜주면 엄청 고마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쌓은 신뢰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개발 독재 시절 중동 건설 붐을 타고 국내 기업들이 거의 맨 몸으로 해외 진출에 나설 때는 이런 '신화' 같은 얘기가 많았다.
채 대표는 이전에도 매달 열흘 이상 사우디 현지법인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는 비즈니스포스트와 만나 "사우디 정보통신부 장관과 주택부 장관 등 정부 당국자들이 수시로 나를 부르고, 그 때마다 바로 달려간다. 현지에선 술을 못 마시고 다른 문화적 차이도 커 생활이 많이 불편하지만, 가능하면 월 열흘 이상은 현지에서 일하려고 한다. 현지 시장을 공략하려면 무엇보다 신뢰부터 쌓아야 하니까"라고 했다.
그는 "현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요즘은 내 몸에 베두인(아랍 인종)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든다"고 했다. 그만큼 현지 문화와 현지 정부 사람들과 일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신뢰가 생겼다는 얘기다.
네이버는 2022년 저탄소 스마트시티 '네옴시티' 건설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방한을 계기로 중동 시장에 눈을 떴다. 사우디 정보통신부 장관과 주택부 장관 등 현지 정부 당국자들이 빈 살만 왕세자 방한 전후 시기 이후 우리나라를 찾을 때마다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 제2 사옥(네이버 1784)을 둘러보길 원했는데, 채선주 네이버 대외대표가 나서서 챙겼다.
이들은 귀국 뒤 정보기술을 활용한 정부 혁신이나 새 인프 구축 계획에 필요한 자료나 컨설팅이 필요할 때마다 채 대표를 찾거나 불렀고, 다른 지인과 관료들에게도 채 대표를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네이버는 중동 시장을 다시 보게 됐고, 그 중심엔 채 대표가 있었다. '로봇박사' 석상옥 네이버랩스 대표 등과 함께 '모래사랑'(첫 출장자들이 기념으로 만든 이름)이란 팀을 꾸려 현지 시장 공략에 나섰다. 사우디정부로부터 1천억 원 규모의 일거리를 받은 뒤에는 '네이버 아라비아'란 이름의 중동 현지법인을 세웠고, 그가 대표를 맡았다.
국제관계 상 미국 빅테크들에게 맡기기에는 부담스럽고, 유럽 등 다른 나라에는 기술력을 갖춘 마땅한 기업이 없는 중동 국가 쪽 고민을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중동은 1970년대 중동 건설 붐 때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본 경험이 있고, 지금은 한류 바람이 크게 부는 지역이기도 하다.
네이버 아라비아는 최근 대형 주택단지를 대상으로 시범사업(PoC)을 진행하는 프로젝트 2개를 추가로 맡았다. 네이버지도 서비스의 중동 지역 이식도 추진 중이다.
네이버 아라비아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 프로젝트 성공 이후 사우디는 물론 인근 중동 국가들이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 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해 앞다퉈 추진 중인 스마트 신도시 사업을 겨냥하고 있다.
신도시와 도시 속 건물들을 네이버 1784 사옥처럼 저탄소를 추구하며, 사람과 로봇이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시 건설과 건물을 짓는 것은 토목·건설회사가 하고, 네이버는 도시·건물 속을 스마트하게 만드는 일(소프트웨어)을 맡는다.
네이버가 한국과 국외에서 성공시킨 서비스들을 현지에 진출시키는 일도 한다.
현재 이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게 채 대표다.
네이버가 중동 시장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네이버 직원들의 중동 현지법인 근무 지원도 늘고 있다. 네이버 관계자는 "주위에 중동 현지법인 근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 중 한명"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돼 확산 중인 '중동 전쟁'으로 네이버 중동 시장 진출 사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니 일이 제대로 추진될 리 없다.
네이버도 중동 현지법인을 재택근무로 전환하는 등 현지 안전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네이버 측은 "현지 법인 인력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재택근무 전환했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사우디아라비아 현지와 본사 간 실시간 핫라인을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채 대표는 설 명절을 보낼 겸 한국에 와 있었는데, 중동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 재택 근무를 하더라도 현지에서 하겠다며 짐을 싸고 있다.
네이버 관계자에게 '참 독한 분 아니냐'고 물었다. "독하다기보다 남다른 면이 확실한 분"이라는 답이 왔다.
기시감이 있다. '남다른 면이 확실한' 경우가 이전에도 있었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이 그랬다. 결국 성공했는데, 바로 그 '남다른 면이 확실한' 행보가 성공 스토리를 더욱 맛깔나게 만들었다.
▲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이 2025년 10월31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OE)와의 대화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진으로 건물이 수시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지진에 익숙치 않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엄청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다.
이 의장은 귀국 길을 찾지 않고 현지 직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여진이 끝날 때까지 함께 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홀로 있다가 지진으로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발견되기도. 집에 알리기도 어렵지 않겠냐. 그래서 한 곳에 모여 있기로 했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그 자리에서 죽을 때 죽더라도 라인 개발은 끝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다른 할 일이 없으니 집중력이 생겼고, 라인 서비스 개발 속도가 높아졌다. 예정에 맞춰 출시할 수 있었고, 곧 일본 국민 메신저로 성장했다. 대만과 타이 등 아시아 시장에서도 대박을 쳤고, 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본 현지법인을 미국 증시에 상장시켰다.
라인은 지금도 네이버의 대표적 해외 진출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용자가 3억 명이 넘는다. 이를 시작으로 웹툰 등 후속 서비스들도 잇따라 대박을 터트렸다.
동일본 대지진 때 상황은 라인 서비스 성공 스토리를 더욱 맛깔나게 해주고 있다.
네이버는 2000년대 초반 닷컴 거품 붕괴 때도 '남다른 면이 확실한' 스토리를 남겼다.
닷컴 버블 붕괴의 중심에 있던 새롬기술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네이버 발목을 잡았다. 당시 네이버는 이해진 창업자의 고집으로 검색 서비스란 한우물을 파고 있었다. 미국에 구글이 있다면, 한국에는 네이버가 있다고 할 정도로, 토종 기술 회사로 유망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새롬기술이 네이버를 상대로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했다. 이해진 네이버 대표는 즉각 오상수 새롬기술 사장을 찾아가 "제발 네이버를 놔달라"고 사정했다.
후일담에 따르면 이 대표는 영문도 모른 채 행사장에 불려나갔다가 적대적 인수합병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됐고, 오 사장 집까지 찾아가 인수합병 철회를 요청했다. 회사를 살려내기 위해 무릎까지 꿇었다는 뒷얘기도 전해진다.
당시 이 대표가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네이버 역시 새롬기술처럼 닷컴 버블 붕괴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런 뒷얘기는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며 각색되고 뻥튀기 됐을 수 있다. 하지만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 만들어낸 얘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나중에 네이버의 중동시장 진출이 열매를 맺으면, 이번 채 대표의 전쟁 포화 속 현지법인 복귀 행보가 네이버의 중동시장 진출 성공 스토리를 더욱 맛깔나게 만들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채 대표는 네이버 창업 당시부터 이 의장 곁을 지켰다. 이 의장이 '남다른 면이 확실한' 의사결정과 행보로 서비스를 성공시키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배웠다. 그 과정서 '남다른 면이 확실한' DNA도 함께 옮겨지지 않았을까. 지독함까지. 김재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