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개최된 제16차 유엔사막화방지협약 당사국총회(COP16) 회장 모습. <연합뉴스>
회의를 개최하며 주요목표로 삼았던 기후대응 의제들이 산유국의 반발에 부딪혀 대부분 좌절되면서다.
15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제16차 유엔사막화방지협약 당사국총회(COP16)가 구체적인 이행수단에 합의하지 못한 채 종료됐다고 보도했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은 가뭄, 토질 악화, 사막화 등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결성된 국제기구다. 이번 총회에서 핵심 목표는 기후변화로 인해 세계 각국에서 심화되고 있는 가뭄과 이에 따른 건조지대 확산에 공동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외교 관계자들은 사막화를 막기 위한 주요 논의가 산유국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좌초됐다고 지적했다.
G7(주요7개국) 가운데 한 국가의 장관은 파이낸셜타임스를 통해 "이번 논의에 참가하는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센 압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다른 산유국들과 함께 올해 기후대응과 관련된 회담에서 어깃장을 놓은 것은 이번 사막화 방지 회담 뿐만이 아니다.
앞서 지난달 한국 부산에서 열린 국제플라스틱협약 제5차 정부간 협상위원회(INC-5)와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개최된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도 기후대응 논의를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지난달 25일 국제플라스틱협약 제5차 정부간 협상위원회(INC-5)가 개최된 부산 벡스코. <비즈니스포스트>
이때 사우디아라비아는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주요 산유국들과 함께 협약 초안에 반대하면서 끝까지 논의를 방해했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논평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플라스틱 오염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 노력을 무산시킨 '래킹볼(wrecking ball, 건물을 파괴할 때 쓰는 쇠공)'이었다"고 비판했다.
INC-5 회의 당시 같은 협상그룹으로 묶여 있던 브라질 대표단이 설득을 위한 추가 비공개협상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대표단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압둘라만 알 과이즈 사우디아라비아 협상 대표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번 협정의 포용성, 지속성, 건전성을 희생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른 참여국들도 INC-5가 국제플라스틱협약 성안을 위한 마지막 회의였던 만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산유국 측의 반대는 의도적으로 협상을 무산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비판했다.
마우리치오 카베라 레알 콜롬비아 환경 장관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저들(산유국들)은 우리가 건설적 협약 체결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콜롬비아는 INC-5 개최 일주일 앞서 제16차 유엔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COP16)를 주최한 나라다. COP16은 기후변화에 따른 생물다양성 감소와 환경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도 자금을 지원해야 하는 책임을 진 서방권 선진국들과 중동 부국들이 재정 지원을 거부하면서 논의가 좌초됐다.
2030년까지 매년 생물다양성 보존에 2천억 달러(약 287조 원)를 투입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조달할 방법에는 전혀 합의하지 못했다.
이에 베르나데테 후퍼 세계자연기금(WWF) 글로벌 보호정책 대표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이 정말 실망스럽다”며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먼지구름이 끼어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 지난달 24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대표해 참석한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 장관. COP29는 원래 지난달 22일 부로 종료될 예정이었으나 합의가 좀처람 나오지 않으면서 24일까지 연장해 진행됐다. <연합뉴스>
지난달 중순에 개최됐던 COP29는 '기후재정을 위한 신규 재원목표(NCQG)'에 부합하는 자금 확보를 주요 목적으로 하는 회담이었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COP29 의장실, 각국 학계 전문가들 발표 등에 따르면 NCQG는 2035년까지 매년 최소 2조 달러(약 2872조 원)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됐다.
이보다는 비교적 보수적으로 잡았다고 평가되는 세계경제포럼(WEF)도 최소 1조 달러(약 1436조 원)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하지만 이같은 분석과 달리 COP29는 매년 3천억 달러(약 430조 원)를 확보하는 것에 그쳤다.
COP29에 참석했던 마티아스 프루메리 스웨덴 기후특사는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유럽연합 국가들이 기후재정 지원을 늘리는 것에 합의했음에도 이를 막는 전략을 취했다"며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됨에 따라 산유국들의 차단 시도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COP29 협상에 참여한 미국과 유럽연합 등 주요 선진국들은 기후재원 증액을 대가로 개도국들의 화석연료 퇴출 서약을 요구했었다. 선진국들 제안에 사우디와 산유국들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논의가 난항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재원 규모도 축소된 것으로 파악된다.
붑커 훅스트라 유럽집행위원회 기후위원은 블룸버그를 통해 "화석연료 퇴출은 주기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려왔던 것"이라며 "이번 회의에서도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싸움을 몇 번을 더 거쳐야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향후 개최되는 기후회담 성패 여부는 산유국들의 영향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줄이는지에 달렸다고 지적이 나온다.
참여국 전원이 동의해야 하는 기후회담 특성상 산유국들을 비롯한 소수 국가와 관련 업계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 합의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유엔 사무총장에게 기후총회 개최에 관해 더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며 "특정 기업 또는 대표들은 그들 출신 국가에서 넷제로(탄소중립)를 향한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내놓지 않는 한 참가할 수 없게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