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현 기자 naforce@businesspost.co.kr2024-01-30 14: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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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정부의 자기주식(자사주) 제도 개선안에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포함되지 않으면서 한시름 놓게 됐다.
[비즈니스포스트] 삼성, SK, 롯데 등 그룹사들이 정부의 자기주식(자사주) 제도 개선안에 '자사주 소각 의무화' 내용이 제외되면서 한 숨을 돌리게 됐다.
삼성물산, SK, 롯데지주는 모두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 비중이 높아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되면 오너 지배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사주의 마법'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 방식은 더 이상 활용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자사주 제도개선 간담회’를 열고 자사주와 관련한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자사주 제도가 대주주의 편법적 지배력 확대 수단으로 남용되지 않고, 주주가치 제고라는 본연의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자사주란 기업이 자기자본의 일부를 주식으로 발행하여 자기가 취득한 주식을 말한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최근 미국 기업들은 자사주를 매입해 즉시 소각하는 방식으로 주주환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기업이 자사주를 사들인 뒤 소각하게 되면 발행주식 수가 감소함으로써 주주들이 보유한 주식 1주의 가치가 높아지게 된다.
또 자사주 소각은 배당금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주 입장에서는 세금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는 주주환원 정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은 대다수의 주에서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돼 있다. 미국 시가총액 2위인 애플이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소각한 자사주 규모는 6620억 달러(약 870조 원)로, 이는 애플 시가총액의 22%에 달한다.
하지만 자사주 소각이 의무가 아닌 우리나라는 기업들이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내 상장 대기업 가운데 자사주 보유 비중이 높은 곳으로는 롯데지주(32.5%), SK(24.6%), 삼성물산(12.6%) 등이 있다.
자사주는 그 자체로는 의결권이 없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오너 지배력이 강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경영권 다툼이 발생했을 때 자사주를 우호세력에 매각하면 의결권이 부활해 경영권 방어에 활용할 수 있다.
또 기업이 인적 분할했을 때 자사주가 의결권이 있는 지분으로 전환되는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을 통해 비용 부담없이 기업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삼성과 SK그룹은 과거 자사주를 이용해 경영권을 방어한 적이 있다.
삼성물산은 2015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특수관계인의 지분이 13.65%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표 대결을 벌였는데, 자사주 5.8%를 우호세력인 KCC에 넘겨 승리할 수 있었다.
2003년에는 SK가 헤지펀드 소버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당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지분율은 0.11%에 불과하고 특수관계인 지분을 합쳐도 소버린에는 못 미쳤다. 하지만 SK가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 6.2%를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에 매각해 우호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경영권을 지킬 수 있었다.
SK, 삼성물산, 롯데지주는 현재 모두 각 그룹의 지주사거나 지주사 격이지만 오너 지분율이 높지 않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물산 지분율은 18.1%, 최태원 회장의 SK 지분율은 17.59%,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롯데지주 지분율은 13.02%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사주 활용이 제한되면, 외부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방어하기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