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지우고 ‘베트남’ 넣은 신동빈, 롯데 동남아사업 거점으로 더 키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부회장 시절부터 베트남을 롯데그룹의 주요 사업 무대로 꼽았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이 2022년 8월31일 오전 베트남 주석궁에서 응우옌 쑤언 푹 주석과 만나 회담 전 악수하고 있다. <베트남통신사>

[비즈니스포스트] 베트남은 롯데그룹의 주요 무대다. 롯데쇼핑과 롯데케미칼, 롯데건설 등 주요 계열사 20여 곳이 베트남을 동남아시아 사업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탓에 그 대안으로 베트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말도 있지만 롯데그룹이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시기는 그보다 12년이나 앞선 2005년부터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직접 사업에 유망한 국가로 꼽고 육성한 베트남은 앞으로 장남인 신유열 시대를 여는 데도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이 베트남 사업을 확대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가운데 신 회장의 역할을 빼놓긴 힘들다.

신 회장은 2005년만 해도 그룹 부회장이었다. 부회장으로 승진한지 7년이 넘었지만 롯데그룹은 아직 신격호 회장 체제가 굳건했다.

하지만 신동빈 당시 부회장은 행동반경을 점차 넓히기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계열사로부터 신격호 회장을 거치지 않은 별도 보고를 받으며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신 부회장이 경영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2005년 말에 꺼내든 전략은 ‘글로벌’이었다. 그는 롯데그룹이 앞으로 진출해야 할 지역으로 4개 나라를 꼽았는데 그 가운데 한 곳이 바로 베트남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제 발전과 관련한 잠재력이 높은 4개 나라를 뜻하는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라는 말이 통상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신 부회장은 브라질을 뜻하는 ‘B’ 대신 베트남을 뜻하는 ‘V’를 선택해 롯데그룹이 브릭스(VRICs)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임원들에게 VRICs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 회장이 롯데그룹의 글로벌 사업을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 롯데그룹이 처해 있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롯데그룹은 명실상부 국내 1등 유통기업이었지만 내수기업이라는 한계 탓에 성장성이 막혀 있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받았다.

한국의 인구 변화를 살펴볼 때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미래 먹거리가 없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롯데그룹 내부에도 많았다.

신 회장이 비상장 회사였던 롯데쇼핑을 상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격호 회장이 ‘회사를 왜 남에게 파느냐’며 롯데쇼핑 상장을 내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를 설득해 롯데쇼핑을 2006년 2월 기업공개했다.

신동빈 회장이 롯데쇼핑 상장으로 확보한 현금 약 7천억 원은 이후 롯데그룹이 사업을 해외로 넓히는 인수합병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베트남 사업이 본격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사실 롯데그룹의 베트남 진출은 1990년대 말부터 이뤄지기 시작했다. 롯데제과가 이미 1998년부터 베트남 현지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롯데리아도 1998년부터 현지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주력 계열사들이 뛰어들기 시작한 시기는 2007년부터다.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외국인 투자와 관련한 차별 금지 법안이 통과되자 롯데그룹도 비로소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신동빈 회장이 롯데그룹의 베트남 사업에 공을 들였다는 것은 그의 동선에서도 확인된다.

2017년 사법 리스크 당시에도 일정을 쪼개 수시로 베트남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직접 가지 못한 상황이 됐을 때는 황각규 전 롯데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을 베트남으로 보내 상황을 점검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신 회장이 지난해 사면복권이 이뤄진 이후에도 불과 보름여 만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연달아 방문했다.
 
‘브라질’ 지우고 ‘베트남’ 넣은 신동빈, 롯데 동남아사업 거점으로 더 키운다

▲ 롯데마트는 롯데그룹의 베트남사업 성공을 보여주는 대표적 계열사다. 사진은 롯데마트 베트남 하노이 1호점인 동다점 모습. <롯데그룹 블로그>

롯데마트는 베트남에서 성공한 롯데그룹의 대표적 계열사다.

롯데마트는 2008년 12월 베트남에 1호점 내고 사업에 첫 발을 내딛었다. 진출 6년 동안 현지 매장만 10곳으로 늘리며 빠르게 사업을 확장했다.

베트남 현지를 관광하는 한국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롯데마트는 인지도가 높다. 베트남 주요 대도시를 가도 어김없이 롯데마트가 있어 현지에서 장보기 편리하다는 후기는 블로그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널려 있다.

롯데마트의 베트남사업은 실적 측면에서도 롯데쇼핑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다. 롯데마트가 베트남에서 상반기에 낸 영업이익은 140억 원인데 이는 국내 할인점사업에서 낸 영업이익 40억 원의 3배가 넘는 수준이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마트가 실적을 개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국내만 보면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황이다”며 “베트남사업이 없다면 롯데마트에 대한 증권가 평가도 박해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롯데마트는 베트남에 2분기 말 기준으로 점포는 15곳을 보유하고 있다. 3분기 1곳, 4분기 1곳이 추가돼 올해 말까지 17개로 늘어난다.

롯데마트는 2017년경 베트남에서만 30여 곳의 할인점을 운영하는 현지 2위 유통업체 빅씨를 인수해 영향력을 더 확대하려고 했지만 최소 1조 원이 넘는 가격에 부담을 느껴 결국 직접 매장을 운영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롯데시네마의 성과도 돋보인다. 롯데시네마는 9월 기준으로 베트남에 극장 45개를 보유하고 있다. 현지 시장 점유율은 30%대로 추정되는데 이는 CJCGV에 이은 2위다.

롯데면세점도 베트남에서 영토 확장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롯데면세점은 2017년 베트남에 다낭공항점을 시작으로 2018년 나트랑공항점, 2019년 하노이공항점을 연달아 오픈했다. 코로나19 사태 탓에 사업 확장에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2022년 11월 다낭에 베트남 현지 최대 규모의 시내면세점을 열며 영향력 확대에 다시 고삐를 죄고 있다.

롯데건설 역시 롯데그룹의 베트남사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열사다.

롯데건설은 과거만 하더라도 베트남에서 복합상업시설인 롯데센터하노이와 롯데마트 등 계열사 공사로만 컸다. 하지만 옌벤-라오까이 철도공사와 다낭-꽝아이 도로공사 2개 공구, 로테-락소이 도로공사 등 토목분야에서도 성과를 내며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롯데리아와 엔제리너스 등을 운영하는 롯데GRS 역시 베트남에서만 2021년 말 기준으로 265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롯데GRS는 미얀마와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라오스, 몽골 등에도 진출해 있는데 베트남에 진출한 시기는 다른 국가보다 최고 15년이나 빠르다. 그만큼 롯데GRS가 일찌감치 베트남에 공을 들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롯데GRS는 현지 사업의 성과를 ‘베트남 외식시장 점유율 1위’라고 소개한다.

물론 롯데그룹이 베트남에서 성공만 했던 것은 아니다.

롯데홈쇼핑은 2012년 2월 베트남 대형 미디어그룹과 손잡고 롯데닷비엣이라는 합작법인 설립해 방송 시작했다. 하지만 2018년 베트남 홈쇼핑 시장이 둔화하자 현지 사업을 철수했다.
 
‘브라질’ 지우고 ‘베트남’ 넣은 신동빈, 롯데 동남아사업 거점으로 더 키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22일 그랜드오픈하는 롯데몰웨스트레이크하노이 기념행사에 참석한다. 롯데몰웨스트레이크하노이 전경. <롯데쇼핑>

신 회장은 조만간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한다. 22일 하노이시 서호 인근에서 공식 오픈하는 롯데몰웨스트레이크하노이의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김상현 롯데그룹 유통군HQ(헤드쿼터)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 대표이사 부회장, 정준호 롯데쇼핑 백화점사업부장(롯데백화점 대표), 강성현 할인점사업부장 겸 슈퍼사업부장(롯데마트 대표 겸 롯데슈퍼 대표), 김태홍 호텔롯데 대표이사, 최홍훈 롯데월드 월드사업부 대표이사 등 계열사 사장단도 대거 참석한다.

롯데몰웨스트레이크하노이가 롯데그룹에 주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롯데몰웨스트레이크하노이는 6억 달러가 투자돼 만들어진 대규모 복합쇼핑몰로 여태껏 롯데그룹이 베트남에서 진행한 사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신동빈 회장의 이번 베트남 방문이 더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아들인 신유열 롯데케미칼 상무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신 상무는 지난해 신동빈 회장의 베트남·인도네시아 방문에 동행하면서 대외적으로 공식 행보를 시작했다. 이후 꾸준히 롯데그룹의 여러 행사에 모습을 비추며 신 회장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