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그룹의 바이오사업이 제2의 반도체 사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바이오’에 30여 년 동안 뚝심 있게 투자한 성과가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최 회장은 뚜렷한 수익성이 보이지 않을 때부터 바이오 사업을 적극 지원하며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키워왔는데, 그 결과 신약 개발에서 바이오의약품 생산까지 자체 역량을 갖추게 됐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성공 노하우를 바이오 사업에 이식, 바이오를 반도체에 버금가는 미래 캐시카우로 키우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13일 바이오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SK그룹 지주사 SK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원료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SK팜테코’ 최근 글로벌 제약사와 대규모 수주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SK팜테코는 미국 일라이릴리로부터 대규모 비만치료제 수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계약 기간 5년에 계약 규모는 최소 1조 원에서 최대 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SK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SK팜테코 수주 계약을 확인해 줄 수 없다”며 “의무 공시 대상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의 대기업은 계약금액이 전년도 매출의 2.5% 이상일 때 의무 공시해야 한다. SK의 2023년 연결기준 매출은 131조2379억 원으로, 매출의 2.5%는 3조2800억 원 수준이다.
SK팜테코는 올해 8월 공시를 통해 3147억 원을 투입해 세종시에 첨단 저분자·펩타이드 생산 공장을 증설하겠다고 밝혔다. 펩타이드는 단백질의 구성성분인 아미노산을 2개 이상 연결한 원료로, 일라이릴리 비만치료제 ‘젭바운드’의 핵심 성분이다.
이지수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SK팜테코 저분자·펩타이드 공장은 2026년 완공해 2027년 가동을 시작할 것”이라며 “거대 제약사와 대규모 수주 계약을 통해 높아진 생산 수요에 대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24년 7월2일(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SK바이오팜의 미국 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 본사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다. < SK > |
세계 비만 치료제 시장은 급격히 커지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2030년 세계 비만 치료제 시장 규모가 1300억 달러(약 186조 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비만치료 제약사인 일라이릴리, 노보노디스크는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벅찬 상황인데, 이에 따라 위탁 생산 업체 가운데 하나로 SK팜테코를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의 제약·바이오 투자는 30여 년 전에 시작됐다.
SK는 1993년 SK에너지 대덕연구소에 신약개발연구팀을 만들어 제약바이오사업에 발을 들였고, 2011년에는 신약개발사업부를 분할해 자회사 SK바이오팜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바이오 사업 투자를 강화했다. 2020년 1월에는 SK 완전자회사로 SK팜테코가 공식 출범했다.
SK의 바이오 사업은 오랫동안 수익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바이오 사업에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꾸준한 투자 결과 2019년 11월 K바이오팜이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시험, 판매허가까지 모든 과정을 독자적으로 진행한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미국 이름: 엑스코프리)’가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시판허가를 받았다.
세노바메이트는 현재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10만 명이 넘는 환자가 처방을 받았다.
최 회장은 바이오·배터리·반도체(B.B.C)를 SK그룹의 3대 성장 축으로 설정했고, 최 회장 장녀인 최윤정 부사장도 2017년부터 현재까지 SK바이오팜에서 근무하고 있다.
▲ 미국 SK팜테코 본사 사옥 전경. < SK > |
올해 7월 미국 출장길에서는 최 회장이 SK바이오팜 미국 법인인 SK라이프사이언스 본사를 찾아, 바이오 사업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최 회장은 2030년까지 신약 개발에서 의약품 생산, 마케팅까지 모든 부분에서 자체 역량을 갖춘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SK바이오팜이 신약을 개발하면 이를 SK팜테코가 생산하고, SK라이프사이언스가 제품을 판매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신약 개발에는 SK그룹이 강점을 갖춘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SK그룹이 반도체에서 쌓은 역량도 바이오 사업에 접목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의약품 위탁개발생산은 대량생산을 통해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제품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반도체 사업 구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고객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며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이란 점도 반도체와 비슷하다.
김수현 DS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미 올해 4~5월부터 주요 글로벌 제약사들이 SK팜테코를 포함한 비 중국계 원료의약품 위탁개발생산 기업을 적극적으로 찾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SK가 보유한 SK팜테코 지분 가치는 약 5조 원”이라고 평가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