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 인민해방군에서 장교로 오랫동안 복무했던 그는 창업 10년 후인 1998년부터 조직 문화로 ‘늑대 문화’를 부르짖었다. 늑대의 생존 방식과 같은 조직과 시스템을 만들고 직원들이 늑대처럼 민감한 후각을 가지고 팀플레이에 강해질 것을 주문했다. <화웨이> |
[비즈니스포스트] 로저 마틴(Roger Martin: 전 토론토대 로트먼 경영대학원 학장). 2017년 세계 최고의 경영 사상가(싱커스 50)로 선정된 그는 “기업의 리더들이 군사 전략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했다. 그런 그가 비즈니스 전략가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하는 책은 ‘손자병법’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다.
로저 마틴이 이런 책을 권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승리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군사 전략서를 읽으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피하는 가장 영리한 방법’(the cleverest ways to avoid bloody battles)을 터득하게 된다고 했다.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최고 기술은 싸우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말이다.
필자는 몇 해 전 홍콩과 인접한 중국 선전(深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둥지를 튼 세계 1위의 통신장비 회사이자 스마트폰 제조 업체인 화웨이의 실체를 잠시 목도했다.
당시 한 중국 기자가 “화웨이의 창업자 런정페이(任正非·79)가 군사 전략을 비즈니스에 접목한 대표적인 기업가”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런정페이가 주목한 군사 전략가는 중국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마오쩌둥. 그런 마오쩌둥은 ‘손자병법’에서 배운 전술로 전투 역량을 강화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군대(인민해방군)에서 장교로 오랫동안 복무하다 1988년 마흔넷 나이에 홍콩에서 전화 장비를 수입해 판매하는 무역업을 시작했던 런정페이.
그는 마오쩌둥의 군사전략을 심층적으로 연구했고, 이를 화웨이 경영과 운영에 적용하여 인상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런정페이는 ‘마오쩌둥선집(毛澤東選集)’과 영국 전략가 리델 하트(Liddell Hart)가 엮은 ‘롬멜 전사록’을 즐겨 읽었고, 임원들에게도 권했다.
그런 런정페이가 마오쩌둥으로부터 차용한 군사 전략·전술이란 뭘까? 바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农村包围城市)’는 전략이다. 이는 마오쩌둥이 국공 내전 당시 사용했던 게릴라 전술의 핵심이다.
마오쩌둥은 “적군은 강하고 우리가 약한 상태에서는 먼저 농촌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여건이 무르익으면 도시를 포위하여 그곳을 접수한다”고 선언했다. (중국 포털 sohu 닷컴 2021년 12월 23일)
이게 화웨이와 무슨 관련이 있냐고? 신생 기업의 경우, 선점하기 어려운 시장을 먼저 공략하는 건 성급할뿐더러 성공 가능성도 낮다. 대신에 점령하기 쉬운 주변 시장부터 취해야 한다.
1990년대 초 무렵, 통신장비 시장의 신입생 화웨이는 해외 진출을 고려하면서 먼저 국제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통신장비 강자들이 비교적 관심을 덜 기울이던 다소 ‘헐렁한’ 곳을 눈여겨본 것이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제3세계, 이른바 마이너 시장이었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주류 시장으로 진입했다. 중국 대형 포털 사이트(手机网易网:163.com)의 설명을 덧붙여 본다.
“1998년 창립 10년을 맞이한 화웨이는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을 완성한 후 더 큰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유럽, 미국 등 시장에서 영업력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화웨이에게 농촌은 ‘마이너 시장’, 도시는 유럽과 미국 등 ‘주류 시장’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구축한 진지는 견고했고, 빠르게 글로벌 통신 시장을 잠식해 갔다.
▲ 화웨이는 통신장비 부문에서 세계 1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톱3, 반도체 부문(자회사 하이실리콘)에서 세계 10위 기업이다. 비상장, 중국 군 당국과의 관계 때문에 국영기업이냐, 민간기업이냐는 논란도 있다. <화웨이> |
런정페이의 연설과 관련 기사를 차근차근 읽어보면 거기에도 마오쩌둥 사상이 많이 발견된다.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런정페이는 창업 10년이던 1998년 ‘화웨이의 붉은 깃발은 얼마나 오래 휘날릴 수 있는가?(华为的红旗究竟能打多久)’라는 제목의 글을 쓴 바 있다.
이는 마오쩌둥의 혁명 시절 나온 ‘붉은 깃발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红旗到底打得多久)’라는 말에서 빌려온 것이다. 런정페이의 말에선 화웨이의 깃발이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읽힌다. 당시 54세의 런정페이에게 기업의 안정적인 지속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을 테니.
런정페이는 원래 통신사업에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섀도복싱 (shadow-boxing)’ 훈련을 오랫동안 하고 링 위에 오른 복서 같았다. 이 선수의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또 있다.
“화웨이가 고속 성장을 기록한 2001년 모두 화웨이에 봄이 찾아왔다고 이야기했지만, 런정페이는 내부 회의에서 ‘월동 준비’를 지시했다.” (텐타오·우춘보 저, ‘화웨이의 위대한 늑대 문화’, 스타리치북스)
언젠가 닥칠 실패(겨울)를 기다리는 자는 결코 성공(봄)을 즐기지 않는 법이다. 런정페이는 ‘중국 경제계의 큰 스승’으로 통하는 하이얼(가전업체)의 장루이민(張瑞敏), ‘중국 IT계의 대부’로 불리는 레노버(컴퓨터 제조업체)의 류촨즈(柳傳誌)와 더불어 대표적인 중국 1세대 민간 창업자로 꼽힌다.
류촨즈와 런정페이는 1944년생 동갑(79)이지만, 몇 년 늦게 창업한 런정페이는 “류촨즈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류촨즈는 ‘타조 이론’으로 경쟁 우위 개념을 설파한 탁월한 경영가였다. 타조 이론은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여기 닭 두 마리가 있다. “누가 더 크냐?”며 서로 옥신각신 쪼아댄다. 어느 쪽도 인정하지 않는다. 류촨즈는 이에 빗대, 남에게 인정받으려면 타조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절대적 우위를 가지게 된다고 했다. 닭의 몸집이라면 우쭐대지도, 큰소리를 내서도, 나서지도 말라는 얘기다.
이런 ‘타조 이론’을 화웨이에 적용해 보자. 보잘것없던 ‘닭’에 불과하던 화웨이가 진정한 ‘타조’가 되는 데는 2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화웨이는 창업 22년 후인 201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선정하는 ‘세계 500대 기업’ 리스트에서 397위에 랭크됐다. 중국 민간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당시 세계 통신장비 시장의 1인자는 스웨덴의 에릭슨이었는데, 화웨이가 근소한 차로 뒤쫓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또 있다. 그해 화웨이의 반도체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중국 기업 최초로 글로벌 톱10 기업에 들었다는 사실.
‘타조 화웨이’의 걸음은 성큼성큼 빨랐다. 2018년 마침내 에릭슨을 제치고 점유율 1위에 올랐다. 더 나아가 2020년엔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애플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올해 1분기 폴더블 스마트폰 시장 1위)
하지만 화웨이의 이런 확장은 미국으로서는 큰 위협이었다. 무엇보다 화웨이가 중국의 스파이 행위를 돕고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지 오래다. 미국은 미국산 제품의 화웨이 수출 금지를 넘어 대만, 영국 등 동맹국들까지 끌어들여 미국산 기술을 통해 만든 제품의 화웨이 판매를 금지했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 화웨이의 공급망을 확실히 끊어 놓겠다는 의지였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화웨이에 대한 본격적인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던 4년 전인 2020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미국은 화웨이의 목을 조를 필요가 있다.”(The United States needs to strangle Huawei: 폭스뉴스 2020년 5월 15일)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 벤 사스(Ben Sasse)가 했던 말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올해, 이런 보도가 나왔다.
“미국의 화웨이 암살 시도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America’s assassination attempt on Huawei is backfiring: 영국 이코노미스트 2024년 6월 13일)
단기적으로 화웨이의 목을 조르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대중국 ‘반도체 숨통 끊기(chip choke)’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뭘까?
▲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심천)의 셔코우 해상 터미널 인근 상업지구. 몇 해 전 선전을 방문했을 당시 이곳의 모든 버스와 택시들은 전기차로 운영되고 있었다. 선전에는 화웨이를 비롯해 IT 기업 텐센트, 전기자동차 업체 비야디(BYD), 세계 최대 상업용 드론 제조사 DJI 등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재우> |
여러 분석을 종합하면 ①미국이 화웨이를 규제하면 할수록 화웨이의 전투 심리를 더 자극하고 있으며 ②또 화웨이가 연구개발에 매우 공격적으로 투자하면서 반도체 설계 수준을 상당히 끌어올렸으며 ③게다가 중국 내수 시장을 통해 충분히 자립 강화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①~③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번. 런정페이는 과거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의 공격과 압박이 회사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화웨이가 2000년대 초반 미국 시장에 진출하자 통신 분야의 강자인 시스코가 2003년 1월, 화웨이를 미국 법원에 고소한 바 있다. “자사의 제품을 복제하고 지적재산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화웨이에 별다른 상처를 주지 못하고 1년 반 만에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이 소송은 화웨이의 전투력을 더 끌어올려 줬을 뿐만 아니라 화웨이가 시스코와 동등할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라는 걸 서방 언론에 홍보해 주는 셈이 됐다.
②번. 화웨이가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비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연례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2월 31일 기준 화웨이의 연구개발 지출은 무려 총매출의 23.4%를 차지한다. 게다가 연구개발 인력도 전체 직원 중 약 55%(114,000명)에 해당한다. 여기에다 특허 또한 14만 개를 보유하고 있다. 기술 자립을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③번. 중국은 내수 시장을 어떻게 강화했을까? 그러니까, 벤 사스 의원이 격한 발언을 했던 2020년 5월 중국이 꺼내 든 것이 ‘쌍순환’ 전략이다. (김영우 저, ‘반도체 투자 전쟁’, 페이지2북스)
쌍순환은 내순환(국내 시장)과 외순환(국제 시장) 두 가지를 말하는데, 내순환에 방점을 두고 내수 중심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목표로 했다. 더 나아가 미국의 견제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의 축을 외부(외부 의존도 낮춤)에서 내부(내수 시장 강화)로 전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제 화웨이 내부로 가보자. 화웨이의 성공 배경엔 독특한 조직 문화인 ‘늑대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화웨이의 힘은 이 늑대 문화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과거 런정페이는 “기업이 발전하려면 늑대의 세 가지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한다”며 “첫째, 민감한 후각, 둘째 불굴의 진취성, 셋째 팀플레이 정신”이라고 강조했었다.
하지만 늑대 문화가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나친 충성도를 요구하는 잔혹한 경쟁은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공동체 의식보다 자유분방하고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바링허우(80년대 출생자들) 세대들이 입사하기 시작하면서다. 직원들이 잇달아 죽는 사고가 발생했으며, 화웨이는 언론과 주위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다.
런정페이. 미국의 입장에서 그가 논란의 인물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좀 달리 봐야 하지 않을까? 순수하게 리더 본연의 면모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리더는 포성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런정페이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포성 소리를 듣고 싸울 것인지 말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게 리더(CEO)의 중요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손자는 ‘손자병법’에 이렇게 썼다.
“싸워야 할 때를 아는 것과 싸워서는 안 될 때를 아는 자는 승리한다.”(知可以戰 與不可以戰者勝).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