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21일 개장한 페라리의 전기차 및 하이브리드 차량 제조공장 'e-빌딩' 내부. 페라리는 자체 제작한 전기차를 2025년 연말 공개하고 2026년 양산에 들어간다. <페라리>
SK온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의 고비를 넘는 동안 페라리가 전동화 전환을 예정대로 진행하며 협력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면 ‘버팀목’ 같은 존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8일 뉴욕타임스와 파이낸셜타임스를 포함한 주요 외신을 종합하면 전기차 전환에 속도를 내는 페라리가 비상경영에 돌입한 SK온 배터리 사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페라리는 이탈리아 마라넬로에 위치한 2억 유로(약 3천억 원) 규모의 전기차 전용 제조 공장을 6월부터 가동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페라리가 전기차 공장인 ‘e-빌딩’에서 순수전기차(BEV) 양산에 들어가는 목표 시점은 2026년이다. 2030년에는 전체 신차 가운데 80%를 BEV와 하이브리드(PHEV) 차량으로 내놓는다는 중장기 계획도 세워뒀다.
유럽연합(EU)이 2030년까지 지역 내에서 새로 출시하는 회원국들 신차의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을 2021년 수준 대비 55%로 줄이고 2035년부터는 내연기관차를 아예 퇴출 시킨다는 법안에 합의해 이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페라리와 SK온 사이 협력 관계가 공고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페라리의 전동화 추진은 SK온 사업에도 확실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SK온은 2019년부터 페라리 최초 하이브리드 차량인 SF90 스트라달레부터 현재까지 배터리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페라리는 지난 6월26일 SK온을 ‘2024년 우수 공급사’로 선정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페라리의 오랜 파트너사인 SK온이 배터리 부품들을 공급하면 페라리가 이를 전기차 공장에서 조립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이석희 SK온 대표이사 사장(왼쪽)이 3월26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배터리셀 기술 혁신을 위한 MOU'를 체결한 뒤 베네데토 비냐 페라리 CEO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SK온 >
페라리는 고성능 슈퍼카의 대명사와 같은 브랜드인데 이곳에 5년 동안 배터리를 독점 공급했다는 것은 배터리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는 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SK온이 2021년 10월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물적분할을 통해 분사한 이후 10분기 연속 적자라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페라리와 협업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오랜 협력 관계를 지속해 온 페라리가 전기차 전환을 빠르게 이뤄내면 SK온은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해 배터리 사업에 든든한 버팀목을 마련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SK온은 LG에너지솔루션이나 삼성SDI보다 후발주자라는 점이 영업적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후발주자라 가격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고객사 확보를 위해서는 낮은 공급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고급 브랜드인 페라리가 전기차 생산 속도를 빠르게 늘려가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장 SK온으로서는 배터리 수주 물량을 크게 따낼 수는 없다. 하지만 우수한 배터리 기술력을 증명해 여러 고객사로부터 제값을 받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페라리는 초고가의 차량을 극소수만 생산한다는 창업주 방침 아래 현재도 1년에 생산하는 차량이 1만4천 대를 밑돈다.
페라리가 이미 내연기관차 판매만으로 충분한 수익성을 내고 있다는 점도 SK온 배터리 사업에는 보탬이 되는 요소로 꼽힌다. 전기차 전환에 자금 여력이 충분해 계획했던 일정에 맞게 SK온에서 배터리를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전기차 기업들 사례를 보면 이는 큰 장점으로 여겨진다.
페라리와 같은 슈퍼카 브랜드인 람보르기니뿐 아니라 메르세데스-벤츠와 포드 같은 자동차업체들도 애초 계획보다 전기차 전환 속도를 늦췄다.
이는 배터리를 공급하는 기업들에도 부정적 변수로 작용하는데 SK온과 페라리 관계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반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SK온이 페라리 배터리 수주를 발판으로 다른 완성차 업체들을 얼마나 고객사로 늘려갈 수 있는지 여부가 비상경영 탈출에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뉴욕타임스는 페라리 구매자들이 중고차 시장에서도 높은 가격으로 되팔 수 있는 프리미엄을 기대하고 차량을 사다 보니 배터리 성능이 페라리 전기차 판매에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증권사 번스타인의 자동차 애널리스트 스티븐 라이트먼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페라리에게 전기차 전환은 차량 유지 관리 측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이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