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상업항공전시회 회장에 설치된 쉘 간판.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과 유럽 석유 메이저들이 전력시장에 대응하는 전략이 서로 엇갈리는 모습이다.
BP와 쉘 같은 유럽 석유 메이저들은 대체로 재생에너지 전력시장 관련 자금 투입을 축소한 반면 미국의 엑손모빌과 쉐브론은 화석연료 발전을 중심으로 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다.
인공지능(AI) 산업 열풍으로 변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전력시장 환경 차이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17일 주요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BP와 쉘 같은 유럽 석유 메이저들이 전력시장 진출 관련 지출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 석유 메이저들이 ‘죽음의 계곡’을 탈출하기 위해 진행해오던 전력시장 진출 사업을 축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죽음의 계곡은 석유 기업들이 기존 사업에서 에너지 전환 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좌초되는 상황을 말한다.
화석연료 채굴로 안정적 수익을 원하는 기존 투자자들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요구하는 친환경 투자자 사이에 끼어 사업 방향성을 한쪽으로 확실히 정하지 못한 BP와 쉘 같은 기업들이 이같은 상황에 처한 것으로 평가된다.
BP와 쉘은 올해 들어 현재까지 약 1년 동안 주가가 각각 약 16%, 2% 하락했다. 기업가치가 크게 후퇴하거나 정체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BP와 쉘 등 유럽 석유 메이저들은 죽음의 계곡을 극복하고자 몇 년 전부터 저탄소 솔루션 개발, 재생에너지 등을 포함한 전력시장 진출을 추진해왔다.
전력시장 분석업체 악셀라에 따르면 쉘은 2019년부터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전력시장 진출에 약 118억 달러(약 16조9500억 원)를 투입했다.
같은 기간 동안 BP는 약 68억 달러(약 9조7700억 원)를 사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 같은 사업 방향성은 최근 1년 사이에 크게 달라졌다.
금융분석업체 RBC캐피털마켓에 따르면 BP와 쉘은 2024년 기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와 전력사업 등에 저탄소 솔루션에 사용하는 자본 지출 비중을 각각 7%, 5%로 축소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전체 석유 메이저들의 평균치를 10%가량 밑도는 수치다. RBC캐피털마켓은 이를 놓고 "몇 년 전에 기대한 것에 한참 못 미치는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들 기업이 관련 지출을 줄인 이유로는 글로벌 경기침체로 대출 이자가 올랐고 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면서 전력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은 늘었다는 점이 꼽힌다. 하지만 수요는 예상만큼 늘지 않아 전반적으로 수익성이 기대에 못 미쳤다.
알론 카멜 PA컨설팅 해상풍력 부문 책임자는 파이낸셜타임스를 통해 "BP와 쉘은 리스크가 그들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크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대담한 베팅에 들어간 판돈을 다시 회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반대로 AI산업 붐으로 데이터센터가 급속도로 늘어 확실한 수요처가 확보된 미국에서는 엑손모빌 같은 석유메이저 기업이 오히려 전력산업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 지난해 캐나다 벤쿠버에서 열린 액화천연가스 사업 관련 행사에 참여한 엑손모빌 부스 간판. <연합뉴스> |
로이터와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엑손모빌은 11일(현지시각) 진행한 콘퍼런스콜에서 전력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이전까지 엑손모빌은 자사가 직접 사용할 설비 외에는 발전소를 건설한 적이 없다.
유럽 석유 메이저들과 달리 엑손모빌이 건설하는 시설은 천연가스 발전소다. 다만 친환경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포집 기술을 도입해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약 90% 절감하기로 했다.
엑손모빌은 이미 고객사 몇 곳이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계획과 관련된 대화가 오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석유대기업 쉐브론도 탄소포집 기술을 적용한 천연가스 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제프 쿠스타브손 쉐브론 뉴에너지 사장은 로이터를 통해 "우리도 (엑손모빌과 마찬가지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쉐브론은 전 세계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화력발전소 장비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터센터의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유럽과 달리 미국 석유 대기업들이 전력 산업 진출에 열을 내는 배경으로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라 시장 전망이 매우 밝다는 점이 꼽힌다.
컨설팅회사 ICF가 올해 9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력 수요는 2028년까지 4년 만에 9%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같은 기간 동안 전력 구매자가 지불하는 전기료도 평균 19% 오를 것으로 분석됐다. 수요가 공급을 한참 앞지를 것으로 전망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특히 데이터센터가 밀집된 미국 동해안 중부 일대를 중심으로 수요가 가장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ICF는 미국 동해안 중부 전력 수요가 2050년에는 올해와 비교해 68% 증가할 것이라고 바라봤다.
미국 내 데이터센터 증가세도 향후 몇 년 동안 꾸준히 유지될 것으로 분석됐다.
글로벌 통계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4년 3월 기준 미국 국내에 설치된 데이터센터 숫자는 5381개로 2위 독일(521개)보다 10배 이상 많다.
유럽연합 전체로 따져도 미국이 이미 거의 두 배가량 많은데 이런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 있는 셈이다.
영국 싱크탱크 옥스포드이코노믹스가 올해 9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8년에는 미국 상업용 건물 건설 수요에서 데이터센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8년 기준 약 40%에 달할 것으로 평가됐다. 2014년 5%와 비교하면 약 8배 증가하게 되는 셈이다.
높아지는 전력 수요에 엑손모빌은 최근 빅테크 기업들이 전력 공급 수단으로 눈여겨 보고 있는 원자력발전 사업에도 진출할 의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댄 암만 엑손모빌 저탄소 솔루션 사업 부문 사장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우리는 올해부터 전력산업 진출을 검토하고 시작했고 그것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터센터 산업 성장에 따른 전력 수요가 커질 거란 사실이 명백해졌다”며 “우리는 업계에 더 특별한 이점과 능력들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