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대우 빅딜 무산, 김우중 몰락  
▲ 김우중 대우 회장(왼쪽)과 이건희 삼성 회장

1999년 1월21일 대우 김우중 회장과 삼성 이건희 회장이 서울 한남동 삼성 영빈관 격인 승지원에서 전격적으로 만났다. 두 회장은 만찬을 겸한 자리에서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이 조속히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날 회동에는 양사 구조조종본부장인 대우 김태구 사장과 삼성 이학수 사장이 배석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들어선 김대중 정부에서 재벌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여러 빅딜 논의가 있었다. 대우전자와 삼성차의 빅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논의의 발단은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 결정이었다. 대우와 삼성 두 그룹은 모두 기아차 인수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이로써 삼성자동차는 독자생존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또 대우그룹은 덩치를 키워 구조조정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더욱 자금난의 궁지에 몰리게 됐다.


빅딜에 대우그룹이 적극적이었다. 대우 김 회장에게 빅딜을 통한 자금 확보는 대우그룹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1998년 11월 김 회장, 이 회장 그리고 이헌재 금감위원장 등 3자가 모여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에 합의했다. 삼성차의 빚을 대우가 안고 삼성은 대우전자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삼성차 처리비용을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논의의 진척은 더뎠다. 대우전자와 삼성차의 가치평가를 놓고 두 그룹의 입장차이가 컸다. 1월 두 회장의 회동으로 빅딜은 급물결을 탈 것으로 전망됐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했다.  ‘선인수 후정산’ 등 다양한 문서가 오고가고 두 회장의 회동이 또 있었지만, 결국 빅딜은 무산됐다. 대우그룹에서 삼성차 처리비용을 더 많이 받아 자금난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삼성그룹에서 대우전자를 실시한 결과 부실이 너무 많아 인수에 득이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빅딜이 무산되고 두 그룹과 두 회장의 운명은 엇갈렸다.


삼성그룹은 1999년 6월 삼성차의 법정관리 신청을 전격 발표했다. 1999년 12월 삼성자동차 법정관리인 홍종만 사장은 삼성차의 해외매각 계획을 발표했다. 2000년 4월 프랑스 자동차업체 르노가 6,200억 원에 삼성차를 인수해 르노삼성자동차로 회사명이 바꾸었다.

삼성으로서는 이 회장의 오랜 숙원인 자동차를 포기하고, ‘일등 삼성’이라는 이름에 상처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에 선택과 집중해 오늘날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게 됐다.

빅딜무산 이후 대우그룹은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빅딜이 무산되자 자금난의 숨통은 더욱 조여 들었다. 1999년 7월 김 회장은 10조원 규모의 자산을 담보로 내놓는 조건으로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8월 12개 주력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 대상기업 지정이 이뤄졌다.

그렇게 대우그룹은 해체되고, 김 회장의 ‘세계경영’은 붕괴됐다. 김 회장은 경영 정상화 후 명예퇴진을 바랐으나, 1999년 1월 김 회장은 퇴진을 선언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해외유랑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