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계약직과 같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애쓰고 있는 이유는 비정규직의 '열악한 대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문학번역원이 계약직들에게 보여준 행동은 한마디로 씁쓸하다. '열악한 대우' 정도를 넘어서 계약직들의 개인정보를 도용하고 엉터리 세금보고의 창구로 마음대로 이용하는 단계까지 이르렀고 신속한 책임자 색출과 공개적 사과보다는 문제가 알려지는 것을 막기에 급급하고 있다.
 
황당한 한국문학번역원, 퇴사 계약직 명의도용하고는 협박성 사과

▲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원의 이런 행태가 발견된 것은 번역원에서 1년 동안 계약직으로 일했던 A씨가 연말정산 교육을 받다가 국세청 ‘홈택스’에서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돈이 세금보고된 것을 찾으면서였다.

A씨는 그의 주민등록번호가 분명히 적혀있지만 알지도 못하는 어떤 외국인 앞으로 3년 동안 2천만 원의 보수가 지급된 것을 발견하고는 번역원으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번역원 관계자는 담당자가 없다며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지친 A씨는 언론사에 제보를 했고 언론사의 취재가 시작되자 번역원은 A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러나 A씨가 기대한 것과 달리 번역원의 사과와 정정은 없었다. 5년이나 지난일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며 파악할 수도 없고 알려줄 것이 없다고 잡아떼는 말만 쏟아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취재하는 기자에게도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있는데 퇴사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답변만 내놨다. 돈을 담당직원 혼자서 다루냐고 질문했을 때도 실무 업무와 모든 책임은 직원 개인이 '혼자' 지고 있다는 황당한 답변을 했다. 아예 관리시스템이 없다는 말인가.  

사건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A씨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2명의 동료 계약직원들도 명의가 도용된 사실을 발견했다.

일회성 명의 도용과 허위보수 지급신고가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수년 동안 반복돼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외국인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다는 관계자의 말은 실제로 보수가 지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런 의혹이 제기되자 번역원은 그제야 반응하기 시작했지만 명의가 도용된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잘못을 바로잡지는 않았다.

오히려 A씨를 협박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번역원은 A씨에게 ‘언론에 제보한 다른 계약직원의 이름을 대라’, ‘종합소득 내역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으니 당사자가 과태료를 낼 수 있다’는 등 협박성 말로 으름장을 놓았다. 잘못을 저질러놓고는 이를 문제 삼은 A씨에게 겁을 준 것이다.

계약직원들은 1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했고 번역원을 신뢰했기 때문에 개인정보 등을 모두 제공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개인정보의 도용, 허위 세금보고로 부당하게 납부한 세금, 그리고 협박과 무시였다. 

번역원은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이런 내용과 관련해 감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A씨에게 사과문을 보냈다.

그러나 그 사과문도 황당했다. 

A씨가 받은 사과문에는 ‘비공개7호’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비공개7호 문서는 내용을 공개한 사람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으로 공공기관이 임의로 지정할 수 있는 것이다. 

번역원은 '공개하지 말라'는 협박의 단서를 달아 사과문을 보낸 셈이다. 취재하는 기자에게도 "A씨로부터 사과문을 건네 받았느냐"고 연거푸 따져 물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런 내용은 ‘위법부당한 사업활동으로부터 국민의 재산 또는 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정보’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공개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라며 "공익성을 위해 제보에 용기를 낸 제보자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겁이 날 수 있는데 이런 점을 이용해 명예훼손이나 부정경쟁방지법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처럼 비공개 문서로 사과문을 보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이 사과를 한다면 공개적으로 진심을 담아서 해야하지 않을까. 비공개라는 단서를 달아 놓은 사과문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번역원은 다른 피해 계약직원들을 그냥 덮어놓고 있다.

문체부가 감사를 통해 A씨를 포함한 6건의 명의도용·허위신고 사실을 적발했지만 다른 계약직원들에게는 사과문을 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에게는 명의가 도용됐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만 서둘러 수습하려고 하는 번역원의 태도에 계약직원들은 허탈해 하고 있다.  

번역원은 지금이라도 모든 기간의 임금지급 내역 등 전수조사를 실시해 다른 피해를 입은 계약직원들이 더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 이 같은 사실은 '영업상 비밀'이나 '법인을 현저하게 해칠 수 있는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진상을 알리고 진정한 공개사과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훌륭한 한국문학을 세계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해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곳이다. 그 작업에 동참했다는 사명감으로 일한 계약직원들을 한국문학번역원은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비즈니스포스트 이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