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최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한때 삼성그룹의 승계모델로 삼고 연구했던 곳이다.

이건희 회장은 2003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 참석차 유럽을 방문하던 중 스웨덴으로 직접 건너가 발렌베리그룹의 페테르 발렌베리 '크누트&앨리스 발렌베리 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당시 삼성전자 상무였던 이재용 부회장도 동행했다.

  삼성의 승계모델, 스웨덴 발렌베리 전 회장 사망  
▲ 페테르 발렌베리 전 발렌베리그룹 회장
발렌베리그룹의 페테르 발렌베리 전 회장이 19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페테르 발렌베리 전 회장은 1982년부터 1997년까지 그룹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 회장을 지냈으며 계열사인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아틀라스 콥코 등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발렌베리그룹은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사브자동차 등을 계열사로 둔 150년 전통의 스웨덴 오너경영 기업이다. 1856년 발렌베리 전 회장의 증조부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은행(현 SEB은행)을 설립한 뒤 금융에서 건설, 기계, 전자 등 사업영역을 넓혔다.

작고한 페테르 발렌베리 전 회장은 발렌베리 가문의 4대 후계자다. 그는 3대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전 회장의 차남인데 장남인 마르크 발렌베리가 자살한 뒤 기업을 승계했다.

현재 발렌베리그룹은 마르크의 아들인 마르쿠스 발렌베리가 SEB은행 회장, 페테르의 아들 야콥 발렌베리가 인베스터AB회장을 맡아 투톱 경영을 해오고 있다.

발렌베리그룹은 계열사만 100여 개를 두고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하는 국민기업이다. 이건희 회장은 발렌베리그룹을 삼성그룹의 롤모델로 여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이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을 만나기 위해 스웨덴까지 날아갔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발렌베리그룹은 이런 경제적 위상 뿐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측면에서도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롤모델로 꼽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가훈은 ‘존경받는 부자가 돼라’는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에 속한 기업인들은 경범죄조차 저지르지 않도록 교육을 받곤 했다.

발렌베리그룹은 대표적 오너경영 기업이지만 승계문제도 사회적 합의에 뿌리를 둔다. 창업주 오스카 발렌베리는 자녀를 21명이나 두었는데 혼외 자식인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를 후계자로 낙점했다.

그가 ‘존경받는 기업’이라는 유지를 가장 잘 잘 받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누트는 발렌베리그룹을 은행뿐 아니라 인수합병을 통해 수많은 제조업체까지 아우르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 요건은 엄격하다.
 
경영세습은 적합한 후계자가 있을 경우에 한할 것, 혼자 힘으로 명문대를 졸업할 것, 해군사관학교를 나와야 할 것, 부모의 경험없이 세계 금융중심지에 진출해 실무경험과 금융흐름을 익힐 것, 후계자 평가는 10년이 걸리며 견제와 균형을 위해 2명을 뽑을 것 등이다.

‘경영하되 소유하지 않는다’는 전통은 발렌베리 가문의 또 다른 훈장이다. 그룹 산하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스웨덴 증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그런데도 이들 가문이 보유한 주식과 재산은 몇 백억 원대에 불과하다. 회사 수익이 모두 재단으로 들어가는 기업구조 때문이다.

2대 경영자였던 크누트는 1917년 현재 우리 돈으로 약 3조5천억 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기부해 크누트&앨리스 발렌베리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스톡홀름 경제대학 등 공익사업과 과학기술 분야 후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3대 경영자 마르쿠스 등 나머지 후손들도 자선재단을 만들어 운영에 힘쓰고 있다.

철저한 독립경영 원칙도 발렌베리그룹이 존경받는 또 다른 이유다. 그룹 산하 회사가 100여 개가 되는데 대부분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있다. 분식회계나 오너 친인척들의 독단적 경영을 막기 위한 조처다.

마르쿠스 발렌베리그룹 현 회장은 계열사 최고경영자 40여 명과 함께 2012년 한국을 방문한 적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당시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이들을 직접 영접하는 등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마르쿠스 회장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삼성그룹의 경영승계에 관심을 나타내며 “각 기업들이 같은 환경에 처해있지 않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면서도 “(5대째 가업 승계를 해오면서) 우리만의 경험이 쌓였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