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재광 간다외국어대학교 아시아언어학과 교수가 23일 일본 치바현 간다외국어대학교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도쿄(일본)=비즈니스포스트]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은 배제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 퇴직연금시장 전문가로 꼽히는 류재광 간다외국어대학교 아시아언어학과 교수는 일본 퇴직연금시장에서 디폴트옵션 제도의 효과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류 교수는 국내에서 미래에셋그룹, 삼성생명 등을 거치며 퇴직연금분야 전문 연구원으로 오랫동안 활약해 왔다.
지금은 일본 간다외국어대학교 아시아언어학과에서 현대 한국경제를 주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는 여전히 노인학, 고령화의 한일비교, 퇴직연금, 개인연금제도 등이다.
일본에서는 2018년 기업형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에 본격적으로 디폴트옵션이 도입됐다. 한국보다 5년가량 앞선 것인데 일본에서 디폴트옵션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류 교수는 일본 디폴트옵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23일 일본 치바현 간다외국어대학 연구실에서 류 교수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류 교수는 “결론적으로 일본에서 디폴트옵션은 실패한 것으로 봐도 된다”며 “따라서 한국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부분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이어 “궁극적으로 일본 디폴트옵션에는 강제성이 부족했던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며 “현재 DC형 퇴직연금을 도입한 기업들 가운데 디폴트옵션을 채택한 기업 비중은 40%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이 40%의 기업들 가운데서도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기본값(디폴트)으로 설정해 둔 기업 비중은 65%로 높은 수준을 보였다.
▲ 왼쪽 원형 도표를 보면 DC형 퇴직연금 기업 가운데 디폴트옵션을 채택하고 있는 기업의 비중은 2022년 기준 39.1%에 그쳤다. 오른쪽 그래프는 이 기업들 가운데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디폴트로 설정한 비중이 65.1%에 이른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본 기업연금연합회> |
퇴직연금 자산을 투자형 상품으로 유도해 수익률을 높이고 노후를 대비한다는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의 취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반면 일본 개인들은 DC형 퇴직연금에서 투자형 상품을 많이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기업연금(퇴직연금)연합회에 따르면 개인들이 기업형 DC 퇴직연금에서 투자형상품을 선택하는 비중은 2020년(3월 말 기준, 이하 동일) 48.1%에서 2021년 54.8%, 2022년 57.9%, 2023년 59.8% 등으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디폴트옵션을 기업들의 손에 온전히 맡겨놓았더니 역효과만 초래한 셈이다.
류 교수는 “미래 퇴직연금 수급자의 심정은 투자형 상품을 원하고 있는데 일본 기업들은 향후 손실이 발생했을 때 받을 비난 등을 고려해 디폴트옵션도 지나치게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상품이 완전히 빠져야 한다”고 바라봤다.
그는 “이 경우 기업과 개인 측의 수고로움을 서로 덜 수 있고 디폴트옵션의 취지 자체도 잘 살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일본 DC형 퇴직연금에서 상품 비중의 변화 추이. 2023년 기준 디폴트옵션 투자형상품 비중이 33.5%에 그쳤던 것과 달리 전체 DC형 상품에서 투자형상품 비중은 2020년(48.1%), 2021년(54.8%), 2022년(57.9%), 2023년(59.8%) 등 지속해서 늘고 있다. <기업연금연합회> |
류 교수는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 효과는 부정적으로 봤지만 일본 퇴직연금시장의 전반적 미래는 밝게 봤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투자 문화가 확산하고 있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류 교수는 향후에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본 개인들의 투자에 대한 관심도가 지속해서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류 교수는 이와 관련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한 수업의 사례도 소개했다.
“여기는 외국어 대학이라 학생들이 보통은 경제 과목을 꺼리는 분위기다. 그런데 2022년 여기 와서 경제 기본상식과 개인별 자산운용을 접목한 강의를 하나 만들었다. 첫 해에 80명이 몰리더니 2년차엔 120명, 올해 3년차엔 180명이 수강신청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펀드가 무언지, 대출이 무언지 남아서 질문하는 학생들이 많다.”
기업 중심의 확정급여(DB)형에서 개인이 직접 운용하는 DC형으로 퇴직연금시장의 무게중심이 지속해서 옮겨가고 있는 점도 일본 퇴직연금시장의 주요 변화로 꼽았다.
류 교수는 “인구구조 변화, 자산운용환경 변화, 저금리 지속 등으로 이제는 국가와 기업이 노후를 책임져주는 시대를 지나 개인 스스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다”며 “이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DB형에서 DC형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 간다외국어대학 내 한 구내식당의 모습. 류 교수에 따르면 최근 들어 대학생들 사이에서 투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일본은 5년마다 연금 재정건전성 조사결과를 발표하는데 마침 올해 여름에 새 결과가 나온다. 현재 일본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은 60% 수준인데 올해 발표에서 소득대체율이 50%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류 교수는 “향후에도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이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만큼 일본에서도 이제 공적연금보다 개인 스스로 사적연금에 신경쓰는 분위기다”며 “궁극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기업이 돕는다'는 과거 고도성장 시절 복지모델이 이제 개인중심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짚었다.
류 교수는 1972년 9월생으로 일본 주오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및 석박사를 취득했다.
한일문화교류기금 초청펠로우,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연구위원, 미래에셋자산운용 이사, 삼성생명 인생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등을 거쳐 2022년 4월부터 간다외국어대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금융실무 경험과 민간 연구소 근무 경험을 토대로 한일 사회 경제 변화에 대한 폭 넓은 연구를 수행 중이며 특히 '고령화에 따른 사회경제 변화의 한일 비교연구'가 주된 연구 테마이다. 김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