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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는 실패하고 청계천은 대성공, 조선시대 토목 사업도 '민심'이 갈랐다

김홍준 기자 hjkim@businesspost.co.kr 2024-10-2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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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는 실패하고 청계천은 대성공, 조선시대 토목 사업도 '민심'이 갈랐다
▲ 영조가 하천 준설이 마무리 된 청계천을 돌아보는 광경을 기록한 '준천시사무열도(濬川試射閱武圖)' 가운데 하나인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의 모습. <서울대학교 규장각>
[비즈니스포스트] 최근 사회기반시설(SOC) 구축 과정에서 공사비 상승, 지역주민 반대 등 걸림돌이 나타나면서 사업이 미뤄지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

왕권이 절대적이었을 것 같은 조선시대에도 인프라 건설의 성패는 리더십 외의 다른 요인 때문에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인프라 사업의 성패가 백성들의 호응 여부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20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원자잿값 상승으로 인한 공사비 급상승 흐름이 지속되면서 위례신사선, 서울 서부선 등 기반시설 건설 사업에도 불똥이 튀었다.

위례신사선의 우선협상대상자였던 GS건설은 올해 6월 공사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사업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GS건설은 9월12일에는 서울 서부선 경전철 사업 주관사인 두산건설에 사업 포기 의사를 밝히며 컨소시엄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울 중심 지역과 주변 지역을 잇는 경전철 사업은 기약 없는 지연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정부가 위례신사선과 서부선의 공사비에 상승분을 반영하겠단 입장을 밝히기는 했으나 예정된 공사 기간을 준수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평가를 받는 기반시설임에도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막혀 사업이 지연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동해안 송전망 건설 사업, 하남시 동서울변전소 옥내화 및 증설 사업 등이 꼽힌다.

송전망 미흡으로 수도권에 제대로 된 전력 공급이 실패하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같은 첨단 산업단지가 전력 부족 사태로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문제는 지역주민 반대로 해당 사업들의 속도가 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HVDC) 송전선로 계획은 지역주민 반대로 애초 계획보다 준공이 66개월이나 미뤄졌다. 최근에는 경기 하남시가 ‘동서울변전소 옥내화 증설’을 불허하면서 한전이 법정 공방을 예고하는 일도 발생했다.

현재 동해안 지역의 발전 설비 용량은 최대 17GW(기가와트)에 이르지만 생산된 전력을 운송하기 위한 송전선로의 수송 가능 용량은 11GW 수준으로 매우 미흡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에도 나라에서 진행한 기반시설 건설사업은 공사의 필요성과 공사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반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요소였다.

조선시대의 절대 왕권으로도 백성의 마음을 사지 못해 기반시설 공사에 실패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조선초 태종 시기 여러 차례 진행한 운하 공사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2년(1412년) 3월의 기사를 보면 하정사 지의정부사 정탁이 명나라에 다녀오며 당시 영락제가 증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대운하와 관련한 평가를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탁은 “황제가 북경에 새로 큰 운하를 파서 조운을 통하게 하고 궁궐을 경영해 순행에 대비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운하는 실패하고 청계천은 대성공, 조선시대 토목 사업도 '민심'이 갈랐다
▲ 동서울 변전소 옥내화 뒤 예상 조감도 <한국전력공사>

명나라 대운하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조선 조정에서는 이로부터 8개월 뒤인 태종 12년 11월16일 충청도 안흥량에 운하를 뚫은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다.

안흥량은 지금의 충남 태안 앞바다로 예로부터 조운선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선 사고가 잦았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발간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래 이 지역은 오고 가기가 어렵다는 의미에서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려왔다. 다만 조운선이 실제로 여러 차례 침몰하자 사람들이 이름이 불길하다 여기며 정반대의 의미인 안흥량(安興梁)으로 이름을 고쳤다.

태조 4년(1395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안흥량에서 바람을 만나 침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1455년까지 60여 년 동안 안흥량에서 침몰한 조운선은 200척에 이른다.

고려 공민왕 시기 양광전라경상도 수군체찰사를 지냈던 왕강이 운하공사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안흥랑의 운하 공사는 태종 시절 실제로 진행됐다. 다만 백성들의 반발을 고려해 단 5천 명을 동원했고 공사 기간도 1413년 1월29일부터 2월10일까지로 매우 짧았다.

백성들의 눈치를 보다 날림공사에 가깝게 진행된 운하를 두고 바로 다음 달인 3월12일 조정에서 쓸모 없다는 논의가 나온 것으로 기록됐다.

태종은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도 백성들의 반응을 신경쓰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는 “일이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우선 그것을 바르게 고치는 것이 옳기는 하다만 하필이면 농사해야 하는 시기에 백성을 무용한 일을 하도록 했느냐”며 “백성을 일하게 해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도 실제로 배가 다닐 수 없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태종은 이후 용산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면 조운에 이득이 될 것이라는 좌정승 하륜의 요청을 반려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 한양의 주요 건물들을 모두 총괄한 천재 건축가로 불리는 지의정부사 박자청이 1413년 7월20일 태종에게 “1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면 한 달도 걸리지 않아 사업이 끝날 것”이며 공사 시작을 요청했으나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록은 이를 두고 태종이 사람을 동원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반대로 공사의 필요성을 백성들에게 설득해 기반시설 구축에 성공한 사례로는 영조 시절 공사가 마무리된 청계천 사업이 꼽힌다.

태종이 1406년 처음 공사를 시작해 1412년 일단락한 개천(지금의 청계천)은 영조 시기에 들어서 하천 준설 사업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이는 영조가 즉위한 1725년에 이르면 청계천 바닥이 사실상 평지와 비슷한 높이가 돼 하천 기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영조는 1754년 창경궁 명정문 앞에서 한양 각 지역 대표자 주민들을 만나 청계천을 준설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 묻는 자리를 마련했다. 주민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영조는 호위 군사와 악사들에게 의견을 묻기까지 했다.

주변인을 동원해 여론몰이에 나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장면에서 장구를 맨 악공 하나가 초를 쳤다. 그는 임금 앞에서 모두가 공사에 동의하는 상황에서 "개천을 파고 안 파고는 모두 이롭고 해로울 것이 없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다만 영조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소신을 가진 악공이 가상하다 여겨 상을 주는 것으로 그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영조는 측근 세력의 돌발 행동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후로도 청계천 준설 공사를 위한 여론 형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해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과거에서는 청계천을 파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과제로 내기도 했다. 

청계천 공사를 위한 영조의 의견수렴 과정은 끝내 뜻을 이뤘다. 덕분에 영조는 청계천 준설 사업을 두고 균역법과 함께 "자신의 재위 기간에 달성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는 평가를 남길 수 있게 됐다.

승정원일기 1758년(영조 34년) 5월2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기사관 이해진은 청계천 준설과 관련해 여론이 어떠한지 영조가 질문하자 “도성 내의 여론을 수집해 봤는데 청계천 공사를 하는 것이 옳다고들 합니다”고 답변했다.

영조의 노력에 힘입어 백성들의 지지를 얻은 청계천 공사는 1760년 2월18일에 시작돼 같은 해 4월15일 마무리됐다. 공사에는 한양의 일반 백성들을 포함해 시전 상인, 지방 주민, 승려,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 21만5천 명이 공사에 참여했다.

당시 청계천 공사는 눈이 먼 맹인들도 공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를 희망할 정도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 1760년 2월23일의 기록에는 호조판서 홍봉한이 영조를 만나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불가능하다고 분부를 내렸습니다”고 말하자 영조는 “그 마음이 매우 가상하다”며 감격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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