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핵심사업인 메모반도체 분야 기술력에서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경쟁자들과 격차가 사라졌다는 시각이 많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초격차'. 경쟁자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차이라는 뜻이다. 한때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사업의 위상을 한 마디로 '설명했던' 말이기도 하다.
물론 삼성전자는 업황 악화 속에서도 메모리반도체 분야의 세계 1등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은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놓고 초격차라는 수식어를 쓰지 않는다.
핵심 품목인 D램의 경우 삼성전자는 오랫동안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에 비해 최소 1~2년 이상 앞선 공정 기술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삼성전자와 경쟁업체 사이에 기술 격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이 많다.
특히 첨단 10나노급 4세대 D램 공정 기술에서는 세계 최초 타이틀을 마이크론에 넘겨줬다. 4세대 D램에 처음으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적용해 양산하는 일은 SK하이닉스에 뒤졌다.
삼성전자는 10나노급 1세대부터 3세대 D램까지 항상 '세계 최초' 타이틀을 쥐고 있었으나 기술 주도권을 점차 잃어가는 모습이다.
더구나 생성형 인공지능 확산에 따라 부각되는 차세대 D램인 HBM(고대역폭 메모리)에서도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준 채 삼성전자가 추격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3를 세계 최초로 양산하고 가장 먼저 차세대 제품인 HBM3E도 개발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HBM 시장점유율 추정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46~49%로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0%의 점유율로 SK하이닉스(50%)에 HBM 분야에 뒤졌으나 올해 고객사를 늘리며 비슷한 수준까지 쫓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HBM 파트너가 SK하이닉스라는 점은 현재의 HBM 기술 경쟁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증권업계와 반도체업계의 말을 종합하면 삼성전자는 이르면 4분기 중으로 엔비디아에 HBM 납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엔비디아 측의 요구를 맞추지 못해 정식계약 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이에 당분간 엔비디아의 주요 파트너 위치는 SK하이닉스가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메모리반도체 사업 앞에 초격차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던 삼성전자로서는 이런 현재 상황이 굴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삼성전자가 개발한 HBM3(고역폭메모리).< 삼성전자 홈페이지 > |
메모리반도체의 기술 격차가 사라진 양상은 시장점유율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 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2분기 SK하이닉스 D램 시장 점유율은 31.9%로 2013년 이후 약 10년 만에 30%대로 올라섰다. 1위 삼성전자(38.2%)와 SK하이닉스의 격차는 6.3%포인트로 10년 이래 가장 좁혀졌다.
핵심 사업인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초격차가 사라지자 삼성전자의 수익성도 점차 약해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8년 영업이익 58조8867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보인 뒤 2021년 50조 원대를 살짝 넘기며 반짝했을 뿐 최고 기록을 5년째 새로 쓰지 못하고 있다.
2022년에는 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300조 원을 넘겼는데도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오히려 후퇴했다. 올해는 업황 악화 속에서 반도체 분야에서 수조 원대의 영업손실이 나고 있다.
올해 4분기 이후 메모리반도체 업황 회복에 따른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를 봐도 SK하이닉스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점점 낮아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삼성전자에 있던 기술 초격차에 따른 막강한 이익 창출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는 상황으로 읽힌다.
산업재해 분야에서 한 건의 큰 사고가 터지기 전에 같은 원인으로 수백 건의 전조 증세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용어가 있다.
삼성전자가 요즘처럼 기술력에서 우위를 보이지 못하는 일이 차차 늘어나면 지난 30년간 쌓아온 메모리반도체 분야 시장 지배력이 자칫 한순간에 사상누각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
삼성전자는 최근 가전과 스마트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주요 사업분야에서 모두 정체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업황 회복에 맞춰 우선 핵심 사업인 메모리반도체에서부터 기술 초격차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특단의 행동에 나서야 할 필요성이 크다.
메모리반도체부터 초격차를 다시 이뤄 이익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꿈꾸는 '2030년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라는 목표로 향하는 길 역시 험난해질 수밖에 없다. 박창욱 산업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