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티빙이 웨이브와의 조건부 합병 승인을 따내며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의 판을 다시 짜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내년 말까지 요금제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결합을 허가하면서, 국내 OTT 업계는 본격적인 ‘빅3’ 재편 국면에 돌입했다.
업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티빙을 이끄는 최주희 대표에게 쏠린다. 최근 쿠팡플레이에 내줬던 시장점유율 2위 자리를 되찾을 ‘골든 찬스’가 왔다는 분석이다. 과감한 콘텐츠 투자와 계정공유 금지 등으로 반전을 노려온 최 대표에게 이번 합병은 그간의 전략이 ‘한 방’으로 터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1일 콘텐츠 업계에 따르면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이 현실화되면서 OTT 시장 판도가 크게 뒤바뀔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티빙은 그동안 넷플릭스는 물론 쿠팡플레이에도 2위 자리를 내주며 위기감이 고조되어 왔다. 공정위가 밝힌 지난해 기준 이용자 수 점유율을 보면 넷플릭스가 33.9%로 1위를 차지했고, 티빙과 쿠팡플레이가 각각 21.1%, 20.1%로 접전을 벌였다. 웨이브는 12.4%, 디즈니+가 7.7%로 그 뒤를 이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티빙이 간발의 차로 쿠팡플레이를 앞섰지만 올해 2월부터는 꾸준히 밀리는 추세다. 여기에 쿠팡플레이가 6월부터 유료 멤버십이 없는 고객에게도 광고 기반 콘텐츠를 제공하기로 하면서 티빙의 점유율 수성에 한층 더 부담이 커진 상황이다.
하지만 그동안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던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이 드디어 진전을 보이면서, 쿠팡플레이를 다시 추월할 만한 ‘빅 모멘텀’을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주희 티빙 대표는 2023년 6월 취임 이후 KBO리그 중계 독점, 계정 공유 금지 등 공격적인 전략으로 점유율 확대에 매진해왔다. 웨이브와의 합병 역시 그 연장선에서 가장 강력한 승부수로 꼽힌다.
최 대표는 올해 2월 열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티빙과 웨이브는 가입자 구성이 달라 겹치는 가입자는 약 30% 수준”이라며 “합병 시 콘텐츠 경쟁력과 가입자 규모 모두 급격히 커지며 본격적인 규모의 경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지난 5월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티빙이 716만 명, 웨이브가 413만 명으로 단순 합산 시 1129만 명에 이른다. 다만 두 플랫폼의 가입자 가운데 30%가 겹친다고 가정하면 실제 합병 후 MAU는 약 869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1위인 넷플릭스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나 쿠팡플레이와의 격차를 단숨에 150만 명 수준으로 벌릴 수 있게 된다.
최주희 대표는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2년 내 국내 700만~800만 명, 해외 700만~800만 명 가입자 확보를 목표로 제시했다. 이번 합병만으로 국내 가입자 목표는 사실상 충족되는 셈이다.
▲ 최주희 티빙 대표이사가 2024년 3월12일 열린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CJENM 사옥에서 열린 ‘티빙 K-볼 서비스 설명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티빙>
업계에서는 이번 합병이 이뤄질 경우 콘텐츠 대비 합리적 가격으로 수요가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티빙의 가장 저렴한 요금제는 광고가 포함된 ‘스탠다드’로 월 5500원, 웨이브는 ‘베이직’ 기준 월 7900원이다.
이외에도 티빙은 ‘베이직’ 9500원, ‘스탠다드’ 1만3500원, ‘프리미엄’ 1만7천 원으로 요금제가 세분화되어 있으며 ‘스탠다드’부터 계정 추가가 가능하다. 웨이브는 ‘스탠다드’ 1만900원, ‘프리미엄’ 1만3900원으로 구성돼 있지만 모든 요금제에서 계정 추가는 불가능하다.
공정위에 따르면 티빙과 웨이브는 내년 말까지 기존 요금제보다 더 비싼 요금을 받을 수 없다. 두 플랫폼이 합쳐져 새로운 결합 서비스를 내놓더라도, 현재 요금제 수준과 유사한 가격과 서비스를 유지해야 한다. 티빙과 웨이브의 기본 요금제 구독료를 합치면 1만3400원인만큼 결합 요금제도 1만 원대에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넷플릭스 광고형 요금제가 월 5500원 수준인 가운데 티빙과 웨이브의 결합 요금제가 1만 원대에 형성되면 사실상 국내외 주요 콘텐츠를 월 2만 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즐길 수 있게 된다. OTT 이용자 입장에서는 ‘가성비 구독 조합’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합병으로 ‘국내 드라마와 예능은 티빙·웨이브, 글로벌 오리지널은 넷플릭스’라는 소비 패턴이 한층 뚜렷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결합 서비스의 콘텐츠 구성과 추가 혜택에 따라 기존 넷플릭스 단독 이용자들의 분산 소비 가능성도 점쳐진다.
현재 티빙의 주력 콘텐츠는 한국프로야구와 tvN 드라마, 일부 오리지널 콘텐츠다. 반면 웨이브는 지상파 3사의 드라마와 예능을 전반적으로 포괄하고 있다. 두 플랫폼이 결합하면 콘텐츠 스펙트럼이 대폭 넓어지게 된다. 실제 일부 소비자 커뮤니티에서는 “넷플릭스에 티빙·웨이브만 더하면 사실상 볼 건 다 본다”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공정위의 기업결합 승인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은 아니다. 실제 합병까지는 양사 주주 전원 동의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수는 티빙의 2대 주주인 KT스튜디오지니다. 티빙과 웨이브는 2023년 12월 합병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지만 KT스튜디오지니가 찬성표를 미루면서 절차는 1년 반 넘게 표류하고 있다. IPTV 사업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판단으로 해석된다.
김채희 KT 미디어 부문장은 지난 4월 기자간담회에서 “합병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방향성이 티빙의 주주가치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며 “당사와의 사업적 협력 의지와 가치가 지금은 많이 훼손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콘텐츠 산업 육성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 만큼 합병의 열쇠를 쥔 KT스튜디오지니가 유보적 태도를 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성장 정체에 직면한 K-콘텐츠 생태계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결국 합병에 힘을 실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이기훈 하나증권 연구원은 “이재명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은 K-콘텐츠 제작 전 과정을 국가가 지원하고 OTT 플랫폼을 적극 육성하는 방향”이라며 “이 같은 정책 효과와 맞물려 티빙과 웨이브의 조건부 기업결합 승인이 합병으로 이어질 경우 가입자 증가와 제작비 절감 등 시너지 효과가 크게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예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