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1990년대 세계 전자 산업을 제패했던 소니는 자만과 기술변화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며 2000년대 들어 빠르게 몰락했다. 하지만 게임, 영화, 음악 등 콘텐츠 사업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최근 연간 영업이익 10조 원이 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자산업에서 일본 소니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당시 한국에서 소니 TV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1970년대 후반에나 돼서야 흑백 브라운관 TV를 만들던 삼성전자나 금성사(현 LG전자)는 소니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 할 정도였다.
1968년 자체 기술로 첫 컬러 브라운관TV(트리니트론)를 개발한 소니는 이후 약 30년 간 세계 TV 시장을 장악했다. 1979년에는 세계 최초로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워크맨’을 내놓으면서 세계 전자 산업의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1981년엔 휴대용 디지털카메라를 선보이며 혁신을 이어갔다.
전자 제국을 세운 소니는 1995년 이데이 노부유키 CEO가 취임한 이후 하드웨어를 평정했으니, 앞으로 하드웨어에 담을 콘텐츠가 필요하다며 공격적 콘텐츠 사업 육성에 나선다. 음악, 영화, 게임 등 대규모 콘텐츠 사업 투자에 나섰고 이는 성공하는 듯 했다.
소니는 콘텐츠를 장악하면 자사 여러 하드웨어 제품은 저절로 팔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그러지 않았다. 패착은 자사 하드웨어만의 표준 규격을 고집한 것에서 시작됐다. 소니의 자체 비디오 시스템 규격 ‘베타맥스’를 비롯해 워크맨 카세트테이프를 대체한다면서 내놓은 MD 규격은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힌다.
소비자들은 소니의 콘텐츠를 보기 위해선 소니 전자 제품만 이용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드웨어를 평정했다는 자만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같은 자만심은 결정적 패착을 가져온다. 바로 전자제품의 거대한 디지털 기술 전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브라운관TV의 디지털화 작업을 서두른 삼성전자는 2000년대 들어서부터 빠르게 세계 TV 시장을 잠식해갔다. 액정표시장치(LCD)라는 디스플레이를 단 얇은 평면 디지털TV는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그러나 소니는 초기 삼성이 LCD TV를 내놓았을 때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결과는 2006년 대이변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가 세계 TV 시장에서 14.6% 점유율(매출액 기준)로 12.0% 점유율을 기록한 소니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1위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소니의 몰락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3년 4월 불과 이틀만에 주가가 27% 하락하는 이른바 ‘소니 쇼크’를 시작으로 2009~2014년까지 6년 연속 적자를 냈다. 2013년 순손실만 1조3천억 원이 넘었다. 2012년엔 국제 신용 평가사 피치에서 ‘투자 부적격’ 수준인 신용등급 ‘BB-’를 받았다.
전자 제국 소니는 그렇게 몰락해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2015년 이후 PC사업부 매각, 플라즈마TV 사업 매각 등 수익성이 떨어지는 하드웨어 전자 사업 부문의 대대적 구조조정을 거쳐 소니는 게임(플레이스테이션 포함),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 등 콘텐츠 사업에 더 집중하는 전략을 펼쳤다. 세계 최고 전자기업에서 세계 최고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의 전환이었다.
소니는 다시 부활했다. 2023년 소니의 영업이익은 약 10조5천억 원으로, 약 6조6천억 원을 기록한 삼성전자를 1999년 이후 24년 만에 추월했다.
▲ 중국을 방문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3월28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으며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메모리반도체 사업의 대흥행, TV 등 가전과 휴대전화 사업 성장으로 지난 30여 년 간 삼성전자는 과거 소니의 30년 전자 제국 못지않은 세계 최대 전자 기업 위상을 쌓았다. 하지만 최근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필두로 이익이 급감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최근 삼성전자는 미래사업기획단을 통해 ‘일본 전자 산업의 쇠퇴와 부활’이란 주제로 소니와 히타치제작소 등의 사례를 집중 연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이달 초 도쿄에 개인 사무실을 마련하고, 일본 주요 기업 CEO들과 회동하는 등 다시 일본 배우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과거 소니의 위기가 자만과 혁신의 DNA 망각에서 비롯된 것이듯, 현재 삼성전자의 위기 또한 비대해진 몸집에 혁신보다는 안정에 치우친 것에서 비롯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소니의 몰락과 부활에서 배워야 할 기업은 비단 삼성전자만은 아닐 것이다. 국내 SK, LG, 포스코, 롯데, 한화, HD현대 등 10대 그룹사는 최근 기존 전통 제조업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있다. 기술력을 업은 중국 제조업의 급부상으로 석유화학, 철강, 조선, 전자 등 국내 주력 산업은 빠르게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 시장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 새로운 성장사업으로 신속히 전환해야 몰락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소니의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성장전략은 어쩌면 앞으로 우리 기업들이 반드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이제 기존 전통 제조업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새 성장사업을 발굴해야 할 때다. 김승용 산업&IT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