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준 기자 hjkim@businesspost.co.kr2024-08-2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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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행렬이 2017년 9월24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문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정부가 주택공급 확대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며 1기 신도시 재건축과 3기 신도시 조성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의 주거 공급을 위해 신도시 개발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도심과밀화와 주택공급이라는 문제가 최근에 시작된 어제 오늘날의 일이 아님을 방증하는 사례다.
25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1기 신도시 재정비를 위한 노후계획도시정비기본방침(안)을 발표한 것도 모자라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직접 나서 3기 신도시 조성 현장을 점검하는 등 원활한 주택공급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14일 1기 신도시 등 노후계획도시 재건축을 위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인 노후계획도시정비기본방침(안)을 발표했다. 노후계획도시정비기본방침(안)에는 원활한 1기 신도시 조성을 위해 국토교통부가 마련한 이주대책이 담겨 이목을 끌었다.
유휴부지 및 공공택지 물량을 최대한 활용한 '순환정비용' 이주주택이 마련된다. 분양주택을 임시 거주용으로 사용한 뒤 이를 리모델링해 일반에 재분양하는 방식도 검토된다. 1기 신도시 관내에 있는 기존 영구임대주택을 고층 주상복합으로 재건축해 이주민들의 임시 거처로 활용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정부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3기 신도시도 신속하게 조성하기로 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은 20일 경기 부천 대장 3기 신도시 건설현장을 찾았다.
최 부총리는 “8·8 공급 대책을 차질 없이 이행하기 위해 다음 주 발표를 앞둔 2025년 정부 예산안에 공공주택 공급 물량도 올해 공급계획인 20만5천 가구를 웃도는 역대 최대 수준으로 편성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예산과 함께 공급 대책 후속 법안도 9월 안으로 발의를 완료하고 국회와 적극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의 이주를 위한 신도시 개발이 추진된 적이 있는데 수원 화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삼육서울병원 본관)을 수원 화산(지금의 화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주민이 발생하면서 이들을 위한 새로운 주거 공간이 필요해졌다.
이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옮겨올 곳에 수원부의 읍소재지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백성들의 이주 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사전 준비를 갖춰 놓았다.
▲ 2020년 12월17일 경기 파주시 파주운정신도시의 모습. <연합뉴스>
조선왕조실록 정조 13년(1789년) 7월11일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그 고장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음으로 고을을 옮길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며 “나는 인정이 편안한 뒤에야 지리(地理)도 길해진다고 생각하며 백성을 옮기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각각 살 곳을 정했다”고 말했다.
정조의 아버지 새로 모시기는 매우 신속하게 이뤄졌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정조는 1789년 7월11일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뒤 4일 만에 백성들의 이주 비용으로 10만 냥을 책정하는 행보를 보였다. 수원의 읍소재지는 팔달산 아래로 옮기기로 했으며 광주에서 두 면을 떼어다가 수원으로 붙이는 조치도 취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작성된 ‘수원부지령등록’에 따르면 7월19일에는 우선적으로 이주할 백성 244호를 모아 보상금을 나눠주기도 했다. 9월28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추가로 이주할 대상으로 319호가 있었으며 이주해야 하지만 진행이 더딘 135호를 더해 이주 대상이 모두 합쳐 698호에 이르렀다.
정조는 이주민들의 이주를 위한 보상비용을 지급하며 수원도호부의 새 읍소재지를 조성하는데 힘썼다. 1793년에는 수원도호부를 격상해 화성유수부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으며 화성유수부의 초대 유수로는 신임하던 체제공을 임명했다.
정조가 신도시 조성에 방점을 찍은 것은 1794년 1월의 일이다. 그는 화성유수부를 둘러싸는 성을 짓도록 명령했다. 화성유수부를 둘러싼 성은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됐는데 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이다.
정조는 화성을 조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799년 5월9일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화성과 관계되는 일에는 참으로 내가 온 정성을 다 쏟았다”며 “성곽과 궁실을 보기에 웅장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대개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에 천도가 논의되던 곳에 오늘날 신도시가 조성된 지역도 있다. 바로 경기 파주운정신도시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광해군은 당시 수도이던 한양이 점령되는 사건 등을 겪으며 새로운 도읍지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광해군이 새로운 수도 예정지로 점찍은 곳이 경기 파주 교하면 일대였다. 교하가 외적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대표적인 피난처인 강화도와 가깝다는 전략적인 면이 고려됐다.
광해군은 교하 천도론이 제기된 지 1년 뒤인 1613년 대신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려 교하 지역을 살펴보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천도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다만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막히며 실제 천도는 추진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개발제한구역으로 마련됐던 성저십리(城底十里)가 시기가 지남에 따라 사실상의 신도시 지역으로 개발되는 사례도 발생했다.
심지어 조선 초기인 세종 6년(1424년) 4월18일 기사를 살펴보면 도성 안에 사람은 많고 땅이 비좁아 송사가 끊이지 않으니 원래는 성저십리로 묶여 개발이 제한된 구역인 동대문 밖, 수구문 밖의 땅을 집 없는 사람에게 집터로 떼어 주자는 한성부의 요청을 수용한 내용이 나온다.
같은 해 11월14일에는 해당 지역을 지금의 구에 해당하는 '부(部)'에 부속시키고 동에 해당하는 방(坊)으로 설정하는 등 행정구역을 정했다. 숭신동·창인동 등의 이름이 당시 방으로 지어진 주거지역의 명칭에서 왔다.
세종 때인 1426년 한성부 인구 10만9천 명 가운데 성저십리에 거주하는 인구는 겨우 6천 명이었다. 그러나 정조 때에 오면 성저십리의 인구는 7만6천 명으로 한성부 전체 인구의 40.6%를 차지하는 등 성저십리가 사실상의 신도시로서 기능했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