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2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가수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트위치코리아의 한국 철수를 기점으로 망 사용료 논쟁이 재점화했다.
망 사용료는 통신사(ISP)와 콘텐츠제공사(CP)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지만 공식적으로 해법이 나오지 않고 있다. 민간에 맡기기보다는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정부의 태도는 다소 소극적이다.
망 사용료 부과 대상이 대부분 미국기업인데
윤석열 정부 들어 미국과 관계가 중요해진 데다 총선이라는 대형 정치 일정을 앞두고 민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을 밀어붙이기에 부담도 크다. 망 사용료 문제 해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20일 정관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 등으로 미뤄볼 때 정부에서는 여전히 ‘망 사용료’ 부과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18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구글, 넷플릭스 등 콘텐츠 기업의 요금 정책 등을 두고 "소비자가 부담되지 않도록 빅테크 기업들이 고민해줬으면 한다"고 말했으나 망 사용료와 관련한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과기정통부는 인터넷 콘텐츠업체들의 망 사용료 부담과 관련해서는 중립적이고 객관적 기관을 정해 포럼을 진행해왔고 결과를 여전히 정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10월 열린 과기정통부 국감에서 망 사용료 문제에 이제는 결론을 내야할 때라는 지적을 받고 "빨리 결론이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으나 아직 구체적 정책방향이 나오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 장관은 앞서 6월에도 망 사용료 문제와 관련해 신중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 6월 열린 ‘디지털 미디어‧콘텐츠 투자 활성화 및 금융지원 확대방안’ 업무협약에서 강국현 KT 사장이 이 장관에게 망 사용료 부과를 도와달라고 말하자 이 장관은 “정부가 어떤 입장을 내기가 참 어렵지만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시간을 들여서 종합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박윤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도 10월5일 미디어데이에서 “ISP와 CP가 네트워크에 기여하는 부분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본 뒤 어떻게 분담할지 논의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며 “글로벌 이슈인만큼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리고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정부의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박 차관은 그러면서 올해 안으로 망 사용료와 관련한 정부의 방침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연말이 다 돼도록 소식이 없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9월 기준 국내 월 무선 트래픽은 107만5982TB(테라바이트)로 2019년 9월 55만2082TB에 비해 2배 증가했다. 주요 CP들이 데이터 트래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수익을 거두고 있는 만큼 ISP들은 망 사용료를 부과해야 한다고 본다.
늘어나는 데이터를 지탱할 만한 통신망 구축과 관리에 그만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통신사들은 망 사용료를 받지 않으면 인프라 비용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콘텐츠기업은 통신사업자가 특정 콘텐츠나 기업을 차별·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망 중립성(Network Neutrality) 원리가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용자들이 통신 요금을 내기 때문에 콘텐츠 기업이 망 사용료를 내는 것은 이중 과금이라는 논리도 편다.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의 ’망 사용료 부과로 인한 소비자 후생 변화 및 경제적 파급효과 분석‘ 연구에 따르면 해외 CP의 국내 통신사 매출액 기여분 총합은 2022년 기준 약 4조207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CP 들은 이미 통신사 매출에 기여하고 있는 만큼 망 사용료를 추가로 부담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 있다.
망 사용료를 둘러싼 업계의 시각 차이가 뚜렷한 만큼 정부가 나서서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대응이 소극적이라는 말이 없지 않다.
지난해 11월 윤영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망 사용료 관련 법안 검토보고서에서도 공정거래위원회와 과기정통부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의 불공정 거래행위와 중복되며 이중 규제 부담이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러한 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놓고 망 사용료 논쟁의 중심에 미국 기업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주요 CP사인 구글과 유튜브, 넷플릭스, 트위치 등이 모두 미국기업이라 정부가 망 사용료 부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면 미국과 통상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4월 망 사용료 법안이 국회 상임위 소위에서 논의될 조짐이 보이자 크리스토퍼 델 코소 주한 미국 대사 대리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주최한 국내 기업환경 세미나에 참석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그는 망 사용료법이 미국 기업의 한국에서의 사업과 투자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국제 기준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통신사 가운데 직접 인터넷망을 구축한 회사가 없어 해저케이블을 설치한 회사에 돈을 내고 회선을 사용한다는 문제도 존재한다. 미국 기업이 설치한 해저케이블을 이용해 서비스를 고객들에게 제공하면서 다시 미국 회사에 이용 요금을 부과하는 데 명분이 약할 수 있다.
한국의 통신3사(SKT·LGU플러스·KT)는 세계 주요 경제 국가 중에 엄청난 양의 인터넷 트래픽을 국외에서 제공받는 유일한 국가다. 아산정책연구원의 해저케이블망과 데이터 안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단 11개의 해저케이블과 3개의 연결돼 있는 육양국(CLS)으로 이어져 있다. 중국이나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미국 및 유럽과 연결되는 회선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지난해 5월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해외 업체가 구축한 글로벌 통신망 인프라로 상당한 혜택을 누리는 국내 통신 업계가 미국 기업들의 ‘무임승차’를 지적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국내 통신사들이 미국 기업이 깔아둔 해저 케이블이나 저장공간을 통해 비용을 크게 절감하고 있다고 바라봤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 정부 및 기업과 관계를 중시하는 외교통상 정책을 펴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미국과 마찰 가능성이 있는 망 사용료 부과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높지 않을 것으로 파악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할 때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최고경영자(CEO) 등 임원진을 만나 4년간 K-콘텐츠에 25억 달러(약 3조3천억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받았지만 논란이 되고 있는 망 사용료 관련 언급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 대통령과 넷플릭스 만남 이후 넷플릭스와 국내 ISP가 진행하던 법적 분쟁이 마침표를 찍었다.
넷플릭스는 9월18일 SK브로드밴드와 합의를 통해 관련 소송을 취하했다. 합의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SK가 ‘캐시 서버’(데이터를 임시 저장해 송출하는 서버)를 일부 허용해주는 대신 망 사용료가 아닌 다른 명목의 대가로 합의금에 상응하는 일정 금액을 지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는 2018년부터 망 사용료 분쟁을 이어왔다. 넷플릭스의 트래픽 폭증으로 해저 케이블 설치 등 큰 비용이 발생하자 SK브로드밴드는 ‘네트워크 자원 이용 대가’를 요구하면서 2019년 방송통신위원회에 갈등 중재를 신청했다.
이에 넷플릭스는 2020년 4월 서울중앙지법에 SK브로드밴드에 망 사용료를 지불할 의무가 없다는 확인을 구하는 민사 소송(채무부존재확인소송)을 제기했지만 2021년 6월 1심에서 패배했다.
세계적으로 망 사용료 부과를 제도화한 곳이 아직 없어 정부가 선제적으로 나서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미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 소송 1심에서 SK브로드밴드가 승소하자 2022년 2월 도이체텔레콤, 오량주, 텔리포니카, 보다폰 등 유럽 4대 통신사 경영자는 유럽연합(EU) 의회에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 대한 인프라 비용분담 규칙을 마련해 달라는 성명을 발표한 사례가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망 사용료 부과 움직임을 보이면 그 파장이 전세계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부와 업계에서 불어올 역풍을 고려하면 정부가 섣불리 나서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통신사들을 향한 여론이 곱지 않다는 부분도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정부에서 망 사용료 부과를 힘있게 추진하기 어려운 이유로 지목된다. 올해 2월 스트레이트뉴스가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전국 만18세 이상 200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이동통신사 서비스에 만족한다는 응답은 31.1%에 머물렀다. 알뜰폰을 제외하면 만족 의견은 29.4%로 30%에 미치지 못했다. 이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