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채널Who] 한국경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재벌을 중심으로 압축 성장한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일반 국민 뇌리에 오너가 곧 기업이란 공식이 통념처럼 각인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오너가 주주 이익을 훼손하면서까지 일가의 이익을 취하는 것도 용인되는 풍조가 있었다.
오너 경영은 장기적 안목에서 기업의 미래를 고민한다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너가 사익편취로 주주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면 이제는 소액주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오너 경영체제가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면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해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특히 경제상황이 불투명해지고 있는 요즘 같은 때는 영업 외적 부문에서 기업가치를 높여야 하는 유인도 커졌다. 그리고 이는 장기적으로 오너의 경영 지배력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
최근 세력화하고 있는 소액주주들과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기관투자자들이 연대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그리고 예전에는 철옹성 같았던 오너 체제도 큰 도전에 직면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SM엔터테인먼트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 쪽이 추천한 감사 선임안이 통과된 게 대표적 사례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얼라인파트너스란 자산운용사다.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가 최대주주 이수만 총괄프로듀서 개인회사 라이크기획에 일감 몰아주기를 해 기업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SM엔터테인먼트는 이수만 총괄프로듀서의 개인 회사인 라이크기획에 매출 6%에 이르는 인세를 지급했는데 SM엔터테인먼트는 상장 후 무려 1400억 원 넘는 인세를 라이크기획에 지급한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에만 프로듀싱 인세 명목으로 240억 원이 지급됐다. 지난해 SM엔터테인먼트 영업이익이 675억 원이었는데 인세가 영업이익의 35.6%에 이르는 것이다.
이에 얼라인파트너스는 주주제안을 통해 자기 측 감사 선임안을 냈다.
얼라인파트너스가 애초 확보했던 SM엔터테인먼트 지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도 소액주주들이 힘을 보태며 안건이 가결될 수 있었다.
주총 당일과 그다음 날 SM엔터테인먼트 주가가 큰 폭으로 올라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이는 오너 경영 탓에 훼손됐던 주주이익이 주주행동주의로 개선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로도 해석된다.
SM엔터테인먼트처럼 잘 알려진 기업뿐 아니라 다소 생소한 곳들도 주주행동주의의 표적지가 되고 있다.
전통 산업군에 속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 가운데 과점 시장에서 꽤 많은 이익을 거두는 알짜 기업들이 제법 있다. 아세아그룹도 그 가운데 한 곳이다.
아세아그룹 내에는 골판지를 제조하는 아세아제지, 시멘트를 생산하는 아세아시멘트 두 상장사가 있는데 두 곳 모두 과점 사업자로서 지위를 누리며 실속을 챙기고 있다. 두 회사를 비롯해 아세아그룹 계열사들을 지주사 아세아가 지배하는 구조다.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하는 VIP자산운용은 아세아그룹이 배당 등을 통한 주주환원을 늘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세아시멘트나 아세아제지 등 주요 계열사들이 벌어들이는 이익에 비해 주주에게 돌려주는 게 적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주사인 아세아, 자회사인 아세아시멘트, 아세아제지 소액주주들도 오너 일가에 대해 썩 좋은 감정은 아니다.
VIP자산운용은 아세아그룹이 오너일가 개인회사로 일감 몰아주기를 한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오너일가 지분이 100%인 삼봉개발이 아세아시멘트가 소유한 경주월드 등을 위탁운영하며 오너일가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삼봉개발의 최근 3년 평균 배당성향은 86%에 이르는데 반해 지주사 아세아의 배당성향은 5.3%, 아세아제지는 8.9%, 아세아시멘트는 9.26%에 불과하다.
VIP자산운용은 내년 정기 주총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필요하면 주주대표소송까지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소액주주들의 집단행동, 기관투자자들의 적극적 경영 개입 등은 주주행동주의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주주행동주의는 주주가 기업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경영진을 향한 책임추궁 구조조정, 경영투명성 제안 등을 통해 주주가치를 높이는 일체의 행위를 일컫는다.
과거에도 주주행동주의를 내건 KCGI가 한진그룹 오너일가와 경영권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대한항공 사내이사에서 불명예 퇴진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캐스팅보트 격이었던 국민연금이 조 회장 연임에 반대한 게 결정타가 됐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가장 입김이 센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이 이른바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용한 사례로 기록됐다. 스튜어드십은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자율지침을 말한다.
외국에서는 주주행동주의가 보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삼성과 현대차 같은 굴지의 대기업과도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하는 기관투자자들을 두고 경영 안정성을 해치는 기업 사냥꾼이란 비난과 함께 소액주주의 권익을 지키는 수호자란 찬사가 공존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소액주주를 배제한 오너의 사익 추구가 빌미를 만든 측면이 더 커 보인다. 소액주주와 공동 소유인 회사의 부를 자기 개인회사로 빼돌리는 행태를 올바른 기업경영으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투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주주행동주의 확산의 중요한 배경이다. 코로나19로 증시 폭락이 거듭되자 이른바 동학개미의 돈이 증시에 유입됐고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소액주주가 늘어났기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도 자연스레 커졌다.
오너 경영이 주주친화적 형태로 변신할 수 있을까? 오너와 소액주주의 상생 방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