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일(현지시각) 유럽의회 본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유럽의회 의사당 내부 전경.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유럽 지도부가 ‘탄소중립산업법(NZIA)’에 잠정합의해 법안 시행을 준비하면서 대중국 무역 장벽을 높인다.
이에 재생에너지, 탄소포집, 원전 등 탄소중립 관련 산업으로 유럽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도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다만,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는 달리 세제 혜택 등 금전적 혜택이 정해지지 않아 '유럽판 IRA'라 불릴 만큼 큰 호재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12일 외신을 종합하면 유럽연합(EU)은 NZIA를 통해 미국 IRA, 값싼 중국산 제품에 대항해 자국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NZIA는 외국 기업들, 특히 중국에 잠식당한 유럽 내 탄소중립 사업에서 역내 생산 제품 비중을 높이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로이터는 5일(현지시각) 중국산에 밀려 도태될 위기에 처한 역내 태양광 사업 부양을 위해 유럽집행위원회가 준비한 법안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NZIA의 골자는 2030년까지 탄소중립, 즉 넷제로(Net-Zero) 관련 제품 수요의 40%를 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다. 자국 제조업 역량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IRA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NZIA를 '유럽판 IRA'라 부르기엔 차이가 크다.
일단 기업에 주는 혜택 가운데 '금전적 인센티브'가 없다. 세제 혜택 등 사업자를 향한 금전적 지원을 핵심으로 하는 IRA와 달리 NZIA는 인허가 제도를 통한 사업자의 행정적 부담 경감을 혜택으로 준다.
이지웅 부경대학교 에너지경제학과 교수는 비즈니스포스트를 통해 “IRA에서는 세제 혜택 등으로 유인하지만 NZIA의 경우 IRA처럼 금전적 인센티브를 명시하지는 못하는 차이가 있다”며 “세금은 각 회원국의 주권사항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시형 대한상공회의소 탄소중립실 과장은 “유럽연합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들에게는 인허가를 빠르게 내줘 역내에서 물건을 생산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는 점에서 IRA와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NZIA는 기본적으로 제조업을 유럽 역내에 유치하기 위해 넷제로 기술과 넷제로 전략 기술을 선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 과장을 분석했다.
유럽 지도부가 합의한 초안에 따르면 전력생산 규모 기준 1기가와트(GW) 이상인 탄소중립 기술 사업은 허가 기간을 최대 18개월, 1기가와트 미만이거나 전력 규모로 파악이 불가능한 사업은 12개월 내로 단축한다.
유럽연합법은 현재 회원국들에 재생에너지 프로젝트 인허가 기간을 최대 27개월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 등 국가에서는 복잡한 절차로 3년 이상 미뤄지는 일이 많았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NZIA가 도입되면 관련 사업 인허가 기간은 현재와 비교해 3배까지 짧아지진다.
특히 전략적 탄소중립 기술로 분류되면 1기가와트 미만 기술은 9개월, 1기가와트 이상은 12개월로 인허가 기간이 더욱 빨라진다.
NZIA 기술 인허가 지원 대상에는 재생에너지, 에너지저장장치(ESS), 히트펌프, 에너지 공급망 기술, 지속가능항공유(SAF) 등 재생연료, 수전해, 연료전지, 소형모듈형원자로(SMR) 등이 포함됐다.
유럽 역내 기업들뿐 아니라 역외 기업들도 법인이나 지사를 유럽 현지에 가지고 있다면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공장을 유럽 현지에 짓는 역외 법인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시형 과장은 "결국 유럽연합(EU)이 (NZIA를 통해) 하고 싶은 얘기는 외부 기업들 보고 역내로 들어와서 제품을 생산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잠정합의안에 따르면 유럽 역내에서 생산된 제품 비중이 65%가 넘어야 지원 대상으로 선정될 수 있다.
기술 인허가 다음으로 가장 크게 지원하는 분야는 탄소포집(CCS) 기술이다. 유럽은 2050년까지 연간 5천만 톤이 넘는 포집 규모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유럽연합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온실가스 감축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유럽집행위원회 계산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탄소포집을 기후정책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일부 여론과 관련, 붑커 훅스트라 유럽집행위원회 기후위원은 6일(현지시각) 기자회견에서 “탄소포집 외에 현실적으로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있는 유럽연합이지만 이미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선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까지 포집해야 한다고 유럽집행위원회는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싱크탱크 엠버에 따르면 유럽은 지난해 온실가스를 2022년 대비 19% 줄인 것으로 집계됐다.
NZIA가 실행되면 유럽연합은 규제 샌드박스 완화, 기술 교류를 위한 ‘넷제로 기술 플랫폼’ 설립, 넷제로 산업 파트너십을 위한 국가 선정도 함께 진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연합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국내 제조품으로 탄소중립 사업 수요를 대체하려는 배경에는 중국이 있다. 유럽 탄소중립산업에서 중국산 제품의 지배력이 거의 독점에 가깝게 높아진 것이다.
현재 유럽연합에서 사용하고 있는 태양광 패널 가운데 97%는 중국산으로 집계됐다. 사실상 유럽산 제품은 거의 쓰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원인은 '싼 가격'에 있었다. 유럽집행위원회 공동연구센터 분석에 따르면 중국 태양광 패널은 유럽산 대비 가격이 약 35% 저렴하다.
▲ 5일(현지시각)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유럽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본회의 도중 발언하고 있는 마이리드 맥기네스 유럽집행위원회 금융서비스 위원. <연합뉴스> |
마이리드 맥기네스 유럽집행위원회 금융서비스 위원은 5일(현지시각) 유럽의회에 “현재 세계적으로 태양광 패널은 과잉공급 현상으로 가격이 전반적으로 40% 이상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를 감안해 유럽집행위원회는 태양광 사업을 진행할 때 가격 외에 다른 요인들도 고려하는 방안을 수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열린 유럽의회 본회의에서는 곧바로 주요 의원들이 유럽 태양광 업계 부양 방안을 논의했다.
유럽의회는 소식지를 통해 “유럽 태양광 업계가 역외 국가들과 불공평한 경쟁에 노출돼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정무역,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NZIA가 중국산 제품에 장벽을 쌓으면 유럽 진출 한국기업들의 반사이익이 기대되는 업종도 있다. 에너지저장장치, 히트펌프, 재생에너지 그리고 원자력 발전 기술 분야다.
이 분야 기업들은 유럽 역내에서 제품의 65% 이상 생산하면 NZIA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증권가에선 헝가리에 공장을 세운 폐배터리 재활용 기술업체 성일하이텍, 포르투갈 풍력타워 및 하부구조물 기업을 인수한 씨에스윈드 등 폐배터리, 재생에너지 관련주들에 주목하고 있다.
폴란드, 헝가리 등 유럽연합 회원국 지역에 이미 법인 혹은 거점을 마련해둔 한국 대기업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히트펌프 등 공조(HVAC) 사업을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잡은 LG전자를 비롯해 유럽 전기차 고객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 SK온 같은 곳들이다.
하지만 한국의 이차전지 기업들이 IRA 수혜를 받기 위해 미국 내 공장 건립을 결정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이 시장 전망이었듯, 유럽 진출 한국 기업들 역시 NZIA 수혜보다는 시장 전망을 중시할 것으로 보인다.
지원 대상 가운데 국내 전문가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원자력 발전소 관련 기술 사업이다. 기존 초안에선 제외됐던 원전 관련 기술사업은 이번 잠정합의안에 새로 편입됐다.
블룸버그는 "유럽에서 원자력 발전을 친환경으로 보는 시각이 크다는 점에 힘입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유럽 상장지수(EFT) 전문 분석 플랫폼 'HANetf'는 지난해 6월 설문에 따르면 세계 자산운용사 가운데 98%는 원자력에너지를 친환경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전 기술의 NZIA 편입은 해외에서 '가성비' 높기로 이름 난 한국 원자력 업계에 기회를 줄 가능성이 있다.
이지웅 교수는 “NZIA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저탄소 기술 중 우리나라가 경쟁력 있는 분야가 원전”이라며 “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분야는 지원대상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기업의 경쟁력이 높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어 “IRA, NZIA는 기후변화 정책이라보다는 저탄소 ‘산업정책’의 성격이 짙다”면서 “우리나라 정부도 산업정책의 측면에서 수소환원제철을 EU보다 빨리 상용화 하는 등 저탄소 기술 상용화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