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 내리는 비는 수백년 동안의 큰 변화 없이 주기적 변동을 이어 왔다. 하지만 기후위기 영향으로 장마의 구분이 불명확해지고 좁은 지역에 폭우가 잦아지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기후변화에 따른 서울의 강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240년이 넘는 강수량 자료가 쌓인 덕분이다. |
[편집자주]
올해 여름, 전 세계는 기후위기를 실감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전례 없이 극단적인 폭염과 가뭄·홍수가 닥쳐왔다. 파키스탄은 국토의 3분의 1이 잠길 정도의 홍수로 국가적 위기에 빠졌다. 유럽은 폭염과 가뭄에 라인강 바닥이 드러났다.
우리 서울은 안녕한가.
기후위기는 먼 나라 이야기로 알고 있었는데 조짐이 좋지 않다. 지난 8월8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에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가 덮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매년 찾아오는 장마가 아니었다. 기후위기가 보낸 '낯선 손님'이었다.
서울의 비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살피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새로운 위기에는 새로운 대처법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서울이 위험하다](1) 245년 강수기록의 경고, '극한 강우'가 찾아왔다
[기후위기, 서울이 위험하다](2) 서울 수해 대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
[기후위기, 서울이 위험하다](3) 대심도터널이 만병통치약인가
[기후위기, 서울이 위험하다](4) 서울 수해 대비, 전문가에게 듣는다 - 한무영 서울대 교수 |
[비즈니스포스트] 서울은 세계 수준의 치수 도시다. 강우 관측의 역사만 240년 가까이 된다.
조선 세종대왕은 1442년 측우기를 통해 세계 최초로 국가 주도의 전국 단위 강수량 관측을 시작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등 혼란을 거치며 한동안 관측이 중단되고 이전 관측 자료는 소실됐다. 하지만 영조가 강수량 관측을 재개했고 1777년 이후 서울의 강수량은 mm 단위로 환산할 수 있을 정도의 정밀한 기록으로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런 기록은 조선 수도 한양의 치수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본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세기가 바뀌고 20년이 지난 지금 수백 년 동안 쌓아온 기록이 무용지물인 시대가 시작됐다.
올해 8월 서울 강남지역을 덮친 폭우, 9월 한반도를 지나간 역대급 태풍 힌남노는 분명 과거와 다른 기후현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서울의 240여 년 강수량 관측기록은 기후변화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됐다.
14일 기상학계의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하면 서울의 장마는 강수량 기록이 남아있는 177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비교적 일정한 주기의 변동성을 유지해 오다 근래 들어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는 여름철 동아시아 몬순(monsoon, 계절풍) 등의 영향으로 비슷한 위도의 다른 지역보다 연강수량이 많고 여름철에 비가 집중된다. 6~8월에 내리는 비는 연강수량의 50~60%에 이른다.
특히 서울에는 한 달 남짓한 장마 기간에 연강수량의 30%에 이르는 비가 내려 다른 지역에 견줘도 장마의 비중이 크다. 장마철 강수량의 변화로 연강수량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서울의 장마철 강수량은 1880~1920년까지 비가 적었던 시기(소우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10년 주기의 변동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의 장마철 강수량에 뚜렷한 변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광용 제주대 교수(지리교육전공)는 2016년 낸 ‘조선 중기 이후 서울의 장마철 강수 평균과 극한강수현상의 변화’ 논문에서 서울의 강수량 변화 추이를 놓고 “1894~2015년에는 10년 마다 10.5mm 증가하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증가 추세가 나타났다”며 “특히 1970~2011년에는 10년 단위로 105.3mm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고 짚었다.
2010년을 전후해 한반도의 장마는 형태적 측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장마는 강수량만 놓고보면 2010년 이후 다소 줄었다.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따르면 중부지방의 장마철 강수량 평균치는 2001~2010년 407.58mm, 2011~2020년 364.22mm다.
이처럼 장마철 강수량이 감소한 것은 장마의 특성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장마는 통상적으로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까지 장마,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장마 휴지기, 8월 하순부터 9월 상순까지 늦장마 혹은 가을장마(2차 우기)로 세분화된다. 통상적으로 장마라고 하면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까지의 첫 시기를 일컫는다.
과거에는 이들 기간 사이의 구분이 뚜렷했다. '장마가 끝났다'는 말이 나오면 곧장 불볕 더위가 시작됐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이전과 같은 장마철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과거에 장마철 강수량은 6월 말에서 7월 초 장마기에 집중됐지만 점점 2차 우기의 강수량 비중도 커지고 있다.
앞서 기상청은 2011년 발간한 장마백서에서 장마의 특성 변화를 놓고 “최근 30년 동안 전반적으로 주요 장마와 2차 우기의 구분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8월 이후에도 장마기와 같이 많은 비가 내리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장마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유희동 기상청장은 8월3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최근에는 8월 초에도 많은 비가 내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오랫동안 장마라고 표현돼온 여름철의 비의 형태가 과연 전통적인 장마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다”며 “최근에 10년 동안의 경향을 보면 분명 전통적인 장마의 형태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마 기간이 불분명해지는 가운데 짧은 시간에 많은 비가 쏟아지는 ‘극한 강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윤진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 연구팀은 올해 6월 국제학술지인 환경연구회보에 과거 30년의 기후 관측 데이터와 최신 기후모델(CMIP 6)를 활용해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기후변화를 연구한 논문을 게재했다.
윤 교수는 논문을 통해 “단기간에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이후 장기간 고온건조한 기후가 강화되는 극한 강수의 발생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은 시간당 30mm이나 하루에 80mm 이상 내리는 비를 ‘호우’로 보고 주의보, 경보 등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기상청의 호우 기준을 훌쩍 넘는 시간당 80mm가 넘는 강한 비는 2019년에 30회, 2020년에 35회, 2021년에 21회 관측되는 등 이미 낯설지 않은 현상이 됐다.
실제 지난 8월8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서는 시간당 141.5mm의 비가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강수량 변화 추세를 종합하면 서울은 앞으로 장마철 구분 없이 6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불규칙하게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형태의 비를 만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올해 장마가 끝난 뒤인 8월8일 강남지역 등 서울 곳곳에서 막대한 피해를 냈던 물난리가 앞으로 빈번해진다는 것이다.
서울의 강수 변화를 촉발하는 주된 원인이 지구 온난화이고 한동안 이런 지구적 추세를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지금의 변화 추세는 오히려 더 강해질 수도 있다.
과거 강수 형태를 바탕으로 30년 빈도인 시간당 95mm를 기준으로 설계된 서울의 배수 시스템이 이제는 부족해졌다는 의미다.
당장 초강력 태풍 힌남노는 앞으로 악화될 기후변화와 강수 형태 변화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힌남노가 이례적으로 강한 위력을 지닌 채 한반도까지 올라온 것은 과거와 달리 한반도에서 가까운 고위도에서 생성됐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이처럼 힌남노가 고위도에서 생성된 원인은 이번 세기 들어 처음으로 3년 연속 이어진 라니냐로 북태평양의 수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힌남노는 9월5~6일 이틀 동안 포항에만 연간 강수량의 30%에 가까운 418.2mm의 비를 뿌렸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