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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모든 것] 가족관계 증명서는 위임장 아니다, 내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은

고윤기 info@kohw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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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모든 것] 가족관계 증명서는 위임장 아니다, 내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은
▲ 가족관계증명서는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이지 위임장이 아니다. <코파일럿>
[비즈니스포스트] 상속과 후견 강의를 하면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 “가족인데, 제가 아버지 대신 서명하면 안 됩니까?” 묻는 사람의 얼굴은 대개 두 부류다. 이미 부모의 통장 앞에서 막혀 본 자녀이거나, 자기 자녀가 언젠가 그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부모다. 나는 안 된다고 답한다. 강의장이 잠시 조용해진다. 이 글은 그 침묵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는 죽음을 준비한다. 유언장을 쓰고 상속세를 걱정한다. 기준 시점은 언제나 사망이다. 그런데 먼저 도착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계약할 수 없는 몸이다. 2024년 출생아 기준 기대수명은 83.7년, 건강수명은 약 73.1년이다. 그 사이 약 10년이 살아는 있지만 예전처럼 판단하기는 어려운 구간이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의 2023년 역학조사를 장래인구추계에 얹으면 치매 환자는 2026년 100만 명을 넘는다. 그런데 유언은 이 10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죽은 뒤에만 작동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무엇이 멈추는지 보면 안다. 예금 인출이 막힌다. 부동산 매매와 임대차, 주식 매도, 보험금 청구, 대출 조건 변경이 막힌다. 그리고 정작 가장 필요한 요양시설 입소 계약도 막힌다. 계약 당사자가 본인이기 때문이다. 강의장의 그 질문으로 돌아온다.

가족이 대신하면 안 되는가. 안 된다. 대리권은 두 곳에서만 나온다. 본인이 온전할 때 준 것과, 법원이 준 것이다. 가족관계증명서는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이지 위임장이 아니다. 배우자도 예외가 없고 장남도 예외가 없다. 치매 어머니 명의의 아파트를 역모기지로 돌리려고 은행에 갔던 자녀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온전하실 때 만들어 둔 문서는 한 장도 없었다. 자녀 전원이 동의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흐려진 뒤에 남는 길은 하나다. 가정법원에 후견 개시를 청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 청구, 정신감정, 심리, 후견인 선임, 후견등기를 거치는 동안 재산은 묶여 있고 선임이 끝나도 부동산 처분에는 법원 허가가 필요하고 재산 변동은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그 무거움 덕분에 상속인 간 다툼은 줄어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전에 후견인 자리를 두고 다툰다는 것이다. 형제가 심판 중에도 대립을 멈추지 않아 법원이 제3자를 후견인으로 세운 집을 나는 여럿 보았다. 이 제도는 2013년 첫해 637건으로 시작해 2024년 한 해 1만8055건이 됐다. 대부분 이미 늦은 뒤에, 자녀가 신청한다.

법이 준비해 둔 후견은 네 가지다.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그리고 임의후견이다. 앞의 셋은 흐려진 뒤에 법원이 정한다. 마지막 하나만 지금 내가 정한다. 절차는 세 단계다. 

첫째, 계약이다. 내가 판단을 못 하게 됐을 때 누가 후견인이 될지, 그 사람이 무엇을 대신할 수 있는지를 정한다. 예금 관리와 부동산 처분 같은 재산 사무만이 아니다. 어느 요양시설에 들어갈지, 어떤 치료를 받을지 같은 신상 사무까지 범위에 넣을 수 있다. 보수를 줄지, 누구에게 어떻게 보고하게 할지도 계약에 적는다.

예컨대 후견인은 배우자로 하되 부동산 처분에는 자녀 한 명의 동의를 받게 하거나, 해마다 자녀 전원에게 재산 내역을 알리게 정할 수 있다. 법정후견에서는 법원이 정하는 것들을, 여기서는 내가 정한다. 이 계약은 반드시 공증인 앞에서 공정증서로 작성한다. 사문서로 쓰면 아무리 도장이 많아도 효력이 없다. 

둘째, 등기다. 계약이 성립하면 후견등기부에 올라간다. 누가 어떤 범위의 대리권을 갖는지 공시되므로, 나중에 은행이나 시설이 그 사람의 권한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후견의 스위치를 켜는 단계다. 여기까지 해도 오늘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내 재산을 내가 관리한다. 실제로 판단능력이 떨어진 뒤에 본인이나 배우자, 가까운 친족, 계약에서 정해둔 후견인 등이 가정법원에 청구하면, 법원이 후견감독인을 선임한다. 그 순간부터 계약이 작동한다.

후견인은 내가 정한 사람이고, 법원은 그 사람을 감독할 사람을 정한다. 법원이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결정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지켜보는 구조다. 마음이 바뀌면 감독인이 선임되기 전까지 공증인의 인증을 받은 서면으로 철회할 수 있다. 등기된 임의후견계약이 있으면 법원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법정후견을 따로 열지 않는다. 오늘 서명하는 것은 권한을 넘기는 일이 아니다. 스위치를 미리 달아두는 일이다. 켜는 날은 나중이고, 누가 켤지와 켜지면 무엇이 움직일지는 지금 정한다.

그런데 아무도 쓰지 않는다. 서울가정법원의 후견 사건 분포를 보면 2019년 말 기준 성년후견 2141건, 한정후견 379건, 임의후견 4건이었다. 흐려진 뒤에 법원으로 간 사람이 2141명, 온전할 때 스스로 정한 사람이 4명이었다는 뜻이다. 이유는 셋이다. 몰라서, 번거로워서, 인정하기 싫어서. 앞의 둘은 해결이 된다. 마지막 하나가 진짜 장벽이다. 

임의후견을 막는 것은 절차가 아니다. 내가 언젠가 판단을 못 하게 된다는 사실을 문서로 인정하는 일이다. 평생 결정을 내려온 사람일수록 이 문서 앞에서 멈춘다. 그리고 그 사람일수록, 흐려진 뒤에는 후견 자체를 거부한다. 내가 왜 후견을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 거부는 대개 가족 갈등으로 옮겨붙는다. 온전할 때 정해두면 이 거부의 순간이 생기지 않는다. 결정하는 사람이 여전히 나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덧붙인다. 계약서보다 중요한 것은 계약한 날의 나를 남겨두는 일이다. 공정증서에는 작성 당시의 상태가 함께 남지만, 그 전후의 진단서나 소견서 한 장이 있으면 훗날 누구도 그날의 정신을 다투지 못한다. 임의 후견 계약에 서명한 날의 내가 온전했다는 기록이, 서명 자체보다 오래 간다. 

강의장의 그 질문에 나는 한 번도 다른 답을 한 적이 없다. 안 된다. 나를 대신할 사람은 가족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내가 정한다. 고윤기 상속전문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의 전문변호사 등록심사를 통과하고 상속전문변호사로 등록되어 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상속과 재산 분할에 관한 많은 사건을 수행했다. 저서로는 '한정승인과 상속포기의 모든 것'(2022, 아템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상속 한정승인 편'(2017, 롤링다이스), '중소기업 CEO가 꼭 알아야 할 법률 이야기(2016, 양문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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