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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현대카드 정태영의 '리더십 로맨스'와 시스템 야구

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 2026-07-27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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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현대카드 정태영의 '리더십 로맨스'와 시스템 야구
▲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은 문화 마케팅과 디자인을 금융에 이식한 전략적 혁신가다. 정 부회장은 “전략적으로 이게 우리한테 맞아? 맞으면 가자”며 전략 실행에 현대카드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왔다. <정태영 부회장 페이스북>
[비즈니스포스트] “처음 자동차에서 금융 분야로 옮겨 왔을 때 나는 금융인들의 모임에서 항상 구석에 앉아서 남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더 정확히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20여 년 전 정 부회장이 현대차그룹에서 현대카드로 막 넘어왔을 당시, 금융은 그에게 낯선 세계였고 페이스북의 언급처럼 그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세월은 반전을 만들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던 아웃사이더는 금융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까지 받았으니 금융의 흐름을 바꾼 게임 체인저가 된 셈이다.

그런 정태영 부회장에게 ‘재벌가 사위(정몽구 명예회장의 사위)’라는 신분은 ‘양날의 검’이다. 오너 일가라서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혁신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지만, 동시에 ‘처가 후광’이라는 편견을 깨고 오롯이 실력만으로 존재 이유를 증명해 내야 했다.

필자는 정 부회장의 페이스북을 유심히 읽는 관찰자 중 하나다. 그의 페이스북은 대중과 교감하는 독특한 아고라(Agora) 같은 것이다. 최근에는 현대카드의 스테이블코인 기술 검증 성과를 직접 전하며, 금융의 다음 지평을 제시하기도 했다.

‘리더십 로맨스(The Romance of Leadership)’란 게 있다. 이 개념을 처음 주창한 인물은 미국 경영학자 제임스 마인들(James R. Meindl) 교수로, 조직의 성공과 실패를 지나치게 리더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일컫는다. 

마인들 교수는 “대중들은 한 기업이 동일한 실적 수치를 보이더라도 ‘이건 리더십의 결과물’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 그 성과를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고 진단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현대카드 정태영의 '리더십 로맨스'와 시스템 야구
▲ 2025년 3월 21일 미국 MIT 경영대학원생들이 현대카드를 방문했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온 정태영 부회장은 MIT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정 부회장이 후배들에게 강연하고 있다. <정태영 부회장 페이스북>
◆ 구원투수의 첫 구종: 슬라이더로 던진 ‘디자인과 라이프 스타일’

이렇듯 금융권에서 리더십 로맨스라는 담론을 대입하기에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인물이 바로 정태영 부회장이다. 그는 CEO 자체가 또 다른 하나의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케이스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를 현대카드에 적용하면 ‘현대카드의 승률 7할은 정태영이다’라는 말로 정의된다. 

정 부회장은 현대카드라는 거대한 마운드 위에서 ‘전략에 집중한다(strategy focused)’는 모토로 금융의 룰을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들어 나갔다. Make Break Make라는 현대카드의 광고 슬로건처럼. 

투수는 한 가지 구종만 던져서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매 이닝마다 새로운 구종을 던져 판을 새로 짜고(Make), 타자의 예측을 깨부수며(Break), 결국 경기를 승리로 다시 재구성한다(Make).

정태영도 그랬다. 디자인으로 성공했지만 디자인에 머물지 않았고 문화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데이터와 AI로 다시 구종을 바꿨다. 현대카드의 Make Break Make는 자신의 성공 공식을 끊임없이 깨뜨리는 자기 파괴(Self-disruption)의 다른 이름이었다.

정 부회장이 적자 투성이의 현대카드 구원투수로 투입된 건 2003년이다(당시 부사장). 카드 대란의 여파로 회사가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다. 후발 주자여서 시장점유율도 1% 후반대에 불과했다.    

마운드에 오른 그가 던진 첫 번째 결정구는 카드 포인트와 혜택 조정의 ‘수익 챙기기’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디자인과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구종 슬라이더였다. 금융권에선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Make’ 시도였다. 

알파벳 카드 라인업으로 복잡한 상품 체계를 단숨에 정리했고, 카드의 옆면에 색을 입히는 ‘컬러 코어’ 디자인으로 지갑 속 카드를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격상시켰다. 

여기에 슈퍼 콘서트와 라이브러리라는 독보적 문화 브랜딩을 결합했다. 현대카드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결제 수단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한다는 문화적 합의를 만들어낸(Make) 것이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현대카드 정태영의 '리더십 로맨스'와 시스템 야구
▲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현대카드 바이닐앤플라스틱(Vinyl & Plastic) 매장. 희귀 LP(바이닐) 음반부터 최신 음반까지 아날로그 음악을 직접 들어보고 구매할 수 있는 체험형 음반 매장이다. 같은 건물 아래에는 뮤지션들의 공연이 펼쳐지는 언더스테이지가 있다. <이재우> 
◆ 잔혹한 Break: 화려한 성공 공식을 스스로 해체하다

경영학적으로 가장 모험적이고 고통스러운 구간은 바로 ‘Break’다. 대부분의 기업은 성공의 정점에서 안주한다. 이미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는 시스템을 스스로 허물 리더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태영은 현대카드가 ‘디자인 컴퍼니’로서 정점에 올랐을 때, 과감하게 그 성공 공식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는 금융업의 미래가 화려한 외관이 아닌 ‘데이터’에 있음을 직감했다. “이제 디자인 기업이라는 말은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AI와 데이터 사이언스 시스템을 구축했다. ‘디자인의 현대카드’를 스스로 해체(Break)하는 과정이었다. 

과거를 부순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Make) 것은 한 차원 진화한 ‘데이터 사이언스 컴퍼니’였다. 핵심은 각 분야 1위 기업들을 하나의 데이터 생태계로 연결하는 ‘도메인 갤럭시(Domain Galaxy)’와 파트너 기업별 맞춤 신용카드인 PLCC(Private Label Credit Card)였다. 서로 다른 산업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AI로 교차 분석해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조다.

리더십 로맨스로 돌아가 보자. 현대카드에는 ‘현대카드=정태영’이라는 공식이 유난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정 부회장이 20년 넘게 단독으로 마운드를 지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현대카드 정태영의 '리더십 로맨스'와 시스템 야구
▲ 압도적 아티스트 비주얼과 알파벳 카드로 장식된 한남동의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디자인 라이브러리, 트래블 라이브러리 등 라이브러리 시리즈는 현대카드가 조성한 독특한 문화공간이다. <이재우> 
◆ 에이스의 부재와 시험대: 원맨팀을 넘어 ‘시스템 야구’로

거꾸로 리더십 로맨스가 극대화된 조직에서 스타 CEO의 부재를 가상해보자. 야구에 비유하자면 7할을 책임지던 에이스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순간(부재)이다. 

마인들 교수에 따르면, 리더의 후광이 사라지면 잘 나가던 조직도 평범해 보이는 착시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리더십 로맨스는 대중과 시장에 강렬한 잔상을 남기기 때문에, 그 뒤를 이을 후계자(불펜 투수)에게는 ‘잔혹사’로 작용한다. 이른바 로맨스의 역풍이다. 

현대카드의 경우, 차기 리더십이 안착하기 극도로 힘든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정 부회장의 부재는 현대카드가 ‘진짜 실력이 있는 조직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잔인한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부재 상황이 온다면, 조직은 정태영이라는 에이스 개인기에 의존하는 야구가 아닌 견고한 ‘시스템 야구’를 증명해야 한다. 다행히 현대카드는 결코 리더 한 명의 직관으로만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오랜 합작 파트너였던 GE에서 전수받은 치밀한 ‘리스크 관리’와 뉴욕현대미술관(MoMA)과의 협업으로 쌓은 감성 자산은 ‘포스트 정태영’ 시대를 지탱할 현대카드 시스템 야구의 핵심 동력이다. 외부 시선이 포착한 면모 또한 탄탄한 팀 플레이의 근거를 뒷받침한다.

△우뇌로 대변되는 감성과 좌뇌로 대변되는 과학이 공존하는 회사(이지훈 저, ‘현대카드 이야기’) △스마트하게 일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회사(김성철 저, ‘현대카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디테일에 집착하는 회사(박지호 저, ‘인사이드 현대카드’). 

이것이야말로 현대카드라는 명문구단의 견고한 시스템의 실체다. 그 시스템 속에서 정태영 부회장은 평소 “머릿속에는 항상 ‘가상의 적’을 산정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가상의 적’은 외부의 경쟁사가 아니다. 그것은 ‘어제의 성공 방식’이자 ‘안주하려는 오늘의 현대카드’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경영사상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혁신의 딜레마’를 떠올렸다. 시장을 지배한 위대한 기업일수록 경쟁자가 아니라 스스로 구축한 어제의 성공에 갇혀 무너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태영의 Make Break Make는 상대를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스스로 가상의 적을 제거하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오늘의 나’를 걷어차라. 스스로 부수지 않으면 상대에 의해 부서진다. 훨씬 더 무참하게. 이재우 경영어록서 ‘일언천금’ 저자
 
이재우는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글로벌 경영인들의 어록을 모은 '일언천금'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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