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상속인의 상속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인 한정승인과 상속포기에는 ‘법정단순승인’이라는 구멍이 존재한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집 한 채와 그 집값을 훌쩍 넘는 빚이다.
상속인들은 서둘러 법원에 서류를 낸다. 누구는 한정승인을, 누구는 상속포기를 선택한다. 서류 접수가 끝나면 한숨을 돌린다. 이제 됐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사람이 죽으면 그의 재산과 채무는 상속인에게 넘어간다. 민법은 상속인에게 세 가지 선택지를 준다.
첫째는 단순승인이다. 재산도 빚도 모두 받겠다는 것이다. 아무 신고를 하지 않아도 3개월이 지나면 단순승인이 된다.
둘째는 한정승인이다. 상속받은 재산의 범위 안에서만 빚을 갚겠다는 선택이다. 빚이 재산보다 많더라도 자기 고유재산은 건드리지 않을 수 있다.
셋째는 상속포기다. 재산도, 빚도 모두 거부하는 것이다. 상속인에서 아예 빠져버리는 선택이다. 한정승인과 상속포기는 빚이 많은 피상속인의 상속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이 보호막에는 구멍이 있다. 바로 ‘법정단순승인’이다. 민법 제1026조는 다음 세 가지 경우에 상속인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다. 이를 법정단순승인이라 한다.
그 첫 번째가 핵심이다. ‘상속인이 상속재산에 대한 처분행위를 한 때’다. 한정승인을 신고했든 상속포기를 신고했든 상관없다.
그 이후에 상속재산을 처분하면 단순승인으로 뒤집힌다. 재산도 빚도 고스란히 떠안는 처지가 된다. 자기 통장, 자기 집까지 채권자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
법원에 서류를 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보호막은 신고 이후에도 스스로 유지해야 한다.
한정승인을 선택한 상속인은 상속재산을 관리할 의무를 진다(민법 제1022조). 상속채권자에게 재산을 제대로 나눠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리 과정에서 자칫 처분행위를 하면 보호막이 날아간다. 판례가 처분행위로 인정한 사례들은 직관적이다. 상속재산인 부동산을 팔아버린 경우, 상속재산에 근저당을 설정한 경우, 상속재산 중 일부를 특정 상속인이 몰래 빼돌린 경우도 마찬가지다.
덜 직관적 사례도 있다. 피상속인의 예금계좌에서 돈을 찾아 생활비로 쓴 경우에도 처분행위가 될 수 있다. ‘내 것이 아닌 돈을 썼다’라는 사실만으로 단순승인이 될 수 있다.
상속포기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착각한다. 상속포기를 하면 처음부터 상속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되니, 상속재산에 손댈 이유도 기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상속포기 신고를 했어도 상속재산을 처분하면 법정단순승인이 된다. 그래서 상속포기를 선택했다면 피상속인의 재산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재산 처분 행위는 어디까지가 허용되는가. 2026년 5월에 대법원 판결(2025다220329)을 소개한다.
사실관계는 이렇다. 임대인이 2020년 6월 사망했다. 임차인은 전세보증금 1억6천만 원을 이미 낸 상태였다. 사망한 임대인의 상속인들은 기존 임대차계약 만료를 앞두고 임차인으로부터 ‘재계약’을 요구받는다. 상속인들이 공동임대인으로 계약서에 이름을 올려주지 않으면 전세자금 대출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상속인들은 계약서에 서명했다. 보증금도 차임도 그대로였다. 임대차 기간만 2년 연장됐다. 특약에는 명시됐다. “기존 계약의 2년 연장계약이며 계약조건은 같다.” “상속 임대인으로 전세보증금을 그대로 승계하고 기간을 연장한다.”
상속인 중 한 명은 이미 한정승인 신고를 해둔 상태였다. 이후 임차인이 보증금 반환 소송을 제기하자 한정승인을 항변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1심, 2심은 이를 기각했다. 임대차계약 연장 서명이 처분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즉 법정 단순승인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이 제시한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이 계약은 새 계약이 아니었다. 보증금도 차임도 목적물도 같았고 바뀐 것은 기간뿐이었다.
둘째, 임차인이 먼저 요구한 결과였다. 상속인들이 자발적으로 새 채무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 임차인의 전세대출 연장에 수동적으로 협조한 것이었다.
셋째, 이 행위를 처분행위로 보면 오히려 한정승인제도의 취지가 훼손된다. 이렇게 대법원은 결론 내렸다. 이 임대차계약 연장은 처분행위가 아니라 ‘상속재산의 관리행위’다.
이 판결이 중요한 것은 단지 피고 한 명을 구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처분행위와 관리행위의 경계를 실무적으로 제시했다는 데 있다.
처분행위는 재산의 현상이나 성질을 변하게 하거나 재산의 변동을 생기게 하는 행위다. 관리행위는 재산의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는 행위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선은 생각보다 애매하다. 이번 사건에서 1, 2심은 처분행위라고 봤고 대법원은 관리행위라고 봤다. 같은 계약서 한 장을 두고 법원도 엇갈렸다.
상속인 입장에서는 어떤 행위가 어떻게 해석될지 미리 알기 어렵다.
필자가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와 관련된 상담을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한 행위를 했는데 이 행위 때문에 상속포기(혹은 한정승인)가 안되는 것인가요?”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실수하고 후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 판결의 상속인은 임차인을 돕기 위해 계약서에 서명했다. 보증금을 돌려줄 형편이 안 되니 최소한 대출 연장만큼은 협조하자는 생각이었다. 선의였다. 그 선의가 하급심에서는 수억 원 빚을 스스로 떠안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됐다.
필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는다면 “잘 모르겠으면 일단 하지 마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원칙은 하나다. 한정승인이든 상속포기든 신고 후에는 어떤 행위든 미심쩍으면 하기 전에 반드시 전문가와 상의하라는 것이다. 선의로 한 행동이, 아무것도 모르고 한 행동이, 수억 원의 빚을 되살릴 수 있다.
이번 피고처럼 대법원까지 가서야 구제받을 행운이 모든 상속인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한정승인도, 상속포기도, 서류를 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후의 모든 행위가 그 보호막을 유지하거나 허무는 데 영향을 미친다.
법은 신고 이후의 행동까지 본다. 모르면 당한다. 아는 것이 방어다. 고윤기 상속전문변호사
| 대한변호사협회의 전문변호사 등록심사를 통과하고 상속전문변호사로 등록되어 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상속과 재산 분할에 관한 많은 사건을 수행했다. 저서로는 '한정승인과 상속포기의 모든 것'(2022, 아템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상속 한정승인 편'(2017, 롤링다이스), '중소기업 CEO가 꼭 알아야 할 법률 이야기(2016, 양문출판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