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이 2024년 9월24일 서울 종로구 영풍빌딩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씨저널] “나는 영풍의 오너가 아니다. 영풍의 주식도 없다. 경영에 관계하지 않아서 직접적으로 지금 말씀드릴 수가 없다. (석포제련소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러 사람이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이 2024년 10월25일 열렸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석포제련소의 유해물질 유출 사고, 각종 중대재해와 관련된 질문에 한 대답들이다.
안동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영풍이 운영하는 석포제련소에서 1997년부터 25년 동안 사망한 노동자는 14명에 이른다. 인근 지역의 환경오염과 관련해 지난 10여 년 동안 120건이 넘는 환경법령 위반, 90차례의 행정처분을 받기도 했다.
◆ 2015년 ‘전문경영인 체제’ 시작, 책임 회피의 시스템 만들기였나
하지만 영풍을 운영하는 오너 일가는 계속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석포제련소의 사고와 관련해 그동안 실제로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은 박영민 영풍 대표이사, 배상윤 석포제련소장, 이강인 전 영풍 대표이사 등 실무 책임자들이며 오너 일가는 공식적으로 책임을 진 적이 없다.
영풍그룹이 ‘전문경영인의 무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를 듣는 이유다.
영풍그룹에서 오너 일가가 각종 경영 현안을 두고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15년 3월
장형진 회장이 임기만료로 대표이사 자리를 내려놓으면서부터다.
장형진 회장은 이때부터 “기업의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해야 한다”라며 오너경영 체제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꾸겠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장 회장이 물러난 시점이 2014년 ‘등기임원 보수 공개 의무화’제도가 시행된 직후라는 점에서 장 회장의 진심이 의심받기도 했다. 상장 회사에 등기임원으로 이름을 올라와 있으면 5억 원 이상의 보수를 받을 때는 이를 공시해야 한다.
◆ 지분은 아들들이 들고 영향력은 아버지가 쥐고, 영풍그룹 '독특한' 전문경영인 체제
영풍그룹은 굉장히 독특한 경영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영풍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영풍의 지분은
장형진 회장의 장남인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대표이사 부회장이 16.89%, 차남인 장세환 영풍그룹 부회장이 11.15%로 나눠 보유하고 있다.
장형진 회장은 지분을 전혀 보유하지 않고 있다. 장 회장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난 오너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 역시 이와 같은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그룹 내에서 장 회장은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장 회장은 영풍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여러 측면에서 영풍그룹의 경영 전반에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장 회장은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 고려아연의 경영에 이사회의 일원으로 개입해왔으며,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사태에서 영풍그룹 장씨 일가의 대표로서 계속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반면 장 회장의 아들들은 영풍 그룹 내에서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장남인 장세준 부회장은 영풍의 자회사인 코리아써키트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고, 차남인 장세환 부회장은 서린상사(현 KZ트레이딩)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이후 연 매출 30억 원대인 비주력계열사 영풍이앤이 미등기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지분은 아들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아들들은 자회사의 경영에만 관여하고 있고, 지분을 갖고 있지 않은 아버지는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의 대소사를 관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 장현진 영풍그룹회장(왼쪽)이 2024년 10월24일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학영의원의 질의를 듣고 있다. <국회 영상회의록시스템 갈무리> |
◆ 이제는 ‘경영권 승계’를 이야기 할 시점, 책임경영의 전환점 될 수 있을까
최근 이와 같은 영풍그룹의 전문경영인 체제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풍그룹이 본격적으로 ‘경영권 승계’ 이야기를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장형진 회장의 맏아들인 장세준 코리안써키트 대표이사 부회장은 1974년생 52세, 둘째 아들인 장세환 영풍그룹 부회장은 1980년생 만 46세다.
장형진 회장이 1946년생으로 올해 80세가 됐다는 것을 살피면 더 이상 승계를 미루기 어려운 시점이 됐다.
이미 지분 승계가 완료된 상황에서, 장 회장의 두 아들이 지주회사격인 영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시점이 영풍그룹의 진짜 ‘승계’가 완료되는 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장형진 회장이 완전히 경영에서 손을 떼고, 아들들도 자회사의 경영을 내려놓고 그룹의 모든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진정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쪽에서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계기로
장형진 회장의 아들들이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영풍그룹은 장남인 장세준 부회장이, 고려아연은 차남인 장세환 부회장이 맡아서 경영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장세환 부회장은 지난달 한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의 프록시 토크에 참석해, ‘영풍 부회장’이라는 직함으로 고려아연 주총 관련 입장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장 회장이 완전히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됐을 때 아들들은 ‘전문경영인 체제’와 ‘오너경영 체제’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