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각 계열사의 기업가치 제고 계획 발표에 속도를 내고 있다.<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계열사를 통해 기업가치 제고 계획(밸류업)을 속속 공개하고 있다.
신 회장의 빠른 대응은 정부의 밸류업 강조 기조에 발을 적극적으로 맞춘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지니지만 그 배경을 놓고 롯데그룹의 절박한 상황 때문이 아니겠냐는 시선도 나온다.
롯데그룹은 유통과 화학 등 주력 사업의 부진 탓에 신용등급이 강등될 위기에 처해 있다. 컨트롤타워인 롯데지주는 이미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간 지 오래다.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면 향후 자금 조달 등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신 회장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밸류업 가동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8일 재계에서는 롯데그룹의 신속한 밸류업 공시 이면에 그룹의 다급한 사정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롯데그룹 계열사들은 최근 연달아 밸류업 공시를 냈다. 17일 롯데웰푸드, 16일 롯데칠성음료, 11일 롯데쇼핑 등이다. 9월27일에는 롯데렌탈도 밸류업을 밝혔다.
현재까지 주요 유통기업 가운데 밸류업을 구체적으로 밝힌 회사는 롯데그룹 소속 계열사 3곳 뿐이다. 신세계와 신세계인터내셔날, 광주신세계 등 신세계그룹 계열사들은 4분기에 밸류업을 공시하겠다는 계획만 세워둔 상태다.
롯데그룹은 과거에도 재계에 지속가능경영, 즉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가 확산할 때 선제적으로 모든 상장 계열사의 이사회에 ESG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새로운 경영 흐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밸류업 공시 역시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새로운 경영 환경에 빠르게 대처하는 모범 사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경영 환경이 녹록치 않다는 점을 살펴볼 때 각 계열사의 밸류업 공시에서 조급함이 느껴진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현재 롯데그룹은 주력인 유통과 화학 계열사의 현금창출 능력이 상당히 저해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해 최근 수 년 사이 공격적으로 진행한 투자 및 인수합병 금액이 3조3천억 원 이상이지만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사이 롯데그룹의 재무구조도 악화하고 있다.
롯데케미칼만 보면 2020년 말 연결기준으로 3조3736억 원이었던 총차입금은 1분기 말 기준으로 10조9408억 원까지 늘었다.
롯데지주의 총차입금도 2022년 말 8조4658억 원에서 1분기 말 9조4820억 원까지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롯데지주와 호텔롯데, 롯데케미칼 등 간판 계열사 3곳의 총차입금은 최근 3년 사이 10조 원 이상 불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신동빈 회장이 8월 롯데지주에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한 것도 이런 경영 난맥상과 무관하지 않다. 롯데지주가 비상경영체제를 내건 것은 총수의 사법리스크 이후 6년 만이다.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일도 쉽지 않아진 상태로 파악된다.
롯데그룹 계열사들은 6월 정기 신용평가에서 신용등급 전망이 줄줄이 부정적으로 햐향 조정됐다. 신용등급 전망이 기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올해 안에 신용등급이 강등될 수 있는 상태라는 의미다.
실제로 롯데그룹은 회사채를 발행하는 데도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분기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회사채 조달 금액은 3900억 원에 그쳤다. 지난해 3분기보다 3천억 원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삼성그룹과 한화그룹, 포스코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등이 모두 회사채 조달 금액을 늘린 것과 대비된다.
▲ 최근 롯데웰푸드와 롯데칠성음료, 롯데쇼핑, 롯데렌탈 등이 연달아 기업가치 제고 계획(밸류업) 공시를 냈다. 사진은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경. <롯데그룹> |
자금 조달이 더 힘겨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신용등급이 떨어질 위기라는 점 때문에 투자심리가 훼손됐지만 실제로 신용등급이 강등된다면 투자자를 모집하는 것이 힘겨워질 뿐만 아니라 발행금리도 높여야 한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볼 때 신 회장이 각 계열사의 적극적인 밸류업 공시를 독려하는 것은 사업 정상화를 위한 재무건전성을 서둘러 회복하자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적극적인 밸류업을 통해 투자심리를 개선해야만 각 계열사의 녹록치 않은 경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자금 조달 등에서 숨통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롯데그룹 각 계열사 역시 재무체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꾸준히 찾고 있다.
롯데쇼핑은 최근 밸류업 공시를 통해 롯데백화점의 비효율 점포로 분류되는 지방 중소 백화점을 대상으로 계약해지와 재개발, 매각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롯데칠성음료 역시 2028년까지 부채비율을 100% 이하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그 방법론으로 보유자산 매각 등이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롯데칠성음료는 15일 이사회를 열고 경북 경산에 위치한 공장을 롯데렌탈에 335억 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롯데그룹의 빠른 밸류업 공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투자자들에게 회사의 중장기 방향성을 공유하고 구체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소개하는 것은 상장사가 본래 지녀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