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 LG 부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표현은 ‘다음에 잘하겠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한 뒤 대안을 내놓는 ‘보스 기질’ 덕분에 LG그룹 곳곳에는 구 부회장의 열정이 녹아있다.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 시대에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LG상사 등을 거치며 그룹 전반에서 활약해 온 그가 이제 LG그룹과 이별을 앞두고 있다.
27일 재계에 따르면 이제 막 시작된 LG그룹 연말인사에서 구 부회장이 용퇴할 것으로 전망된다.
구 부회장의 퇴진은 조카인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4세대 경영체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으로 구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을 때부터 예상돼왔다.
LG그룹은 장자가 그룹을 물려받으면 형제나 사촌이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는 전통이 자리잡고 있어 구 전 회장의 그룹 경영을 도와 온 구 부회장 역시 그룹의 전통을 따른다는 것이다.
구 부회장은 2016년 말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구본무 전 회장을 대신해 그룹 현안을 챙겨왔다. 그룹 전략을 논의하는 사업보고회도 대신 주재했다.
구 전 회장이 취임 이후 다른 사람에게 임원세미나를 맡긴 것은 구 부회장이 처음으로 그만큼 구 부회장의 경험과 추진력을 신뢰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구 부회장은 LG그룹 계열사 임원을 두루 지낸 경륜 있는 경영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LG디스플레이의 성장을 이끌었고 그룹 미래 먹거리인 전장사업을 적극적으로 챙겨왔다.
1999년 네덜란드 필립스에서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인 16억 달러 외자를 유치해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를 설립한 뒤 대형 LCD시장 점유율을 22.2%로 끌어 올려 세계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최근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의 경쟁력 설비 증설과 덤핑 판매로 LCD 패널시장이 공급과잉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LCD 디스플레이에서 매출의 80% 이상이 발생할 정도로 LG디스플레이는 높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구 부회장은 2007년 자리를 옮긴 LG상사에서도 파산을 선언했던 광산을 흑자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LG상사가 광산을 직접 운영하겠다며 경영에 나선 뒤 1년6개월 만의 흑자 전환이었다.
전장사업에서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구 부회장은 2015년 말 정기인사에서 LG의 신성사업추진단장을 맡아 GM, 포드 등 완성차기업들과 전장부품 사업을 논의하는 등 과감한 현장행보를 보이며 전장사업을 키우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2017년 5월 말 이사회에서 LG전자와 힘을 합쳐 글로벌 자동차 헤드램프 기업 ZKW를 1조5천억 원에 인수하는 결정도 내렸다. LG그룹은 SK나 삼성그룹과 달리 5천억 원이 넘는 인수합병을 한 전례가 없어 상당히 공격적 투자라는 말도 나왔다.
이처럼 구 부회장은 새로운 기술력과 제품에 관심이 많아 LG그룹의 새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LG전자 스마트폰 사업부의 적자 탈출에 실패하고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겨주는 등 쓰라린 기억도 안고 있다.
구 부회장의 용퇴는 LG그룹이 ‘
구광모 회장 시대’를 연다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냄과 동시에 계열분리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임박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계열분리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구 부회장이 지금까지 그룹의 경영 전반에서 존재감을 보여 온 만큼 일정 기간 LG 주주로 구 회장의 독자 경영체제에 힘을 실어 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구 부회장이 애정을 쏟아온 전장부품 계열사 일부를 분리해 새 사업을 꾸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LG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모두 밀접한 사업관계를 맺고 있어 전장사업을 들고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경영환경의 위기가 고조될수록 경영진이 기본을 준수하고 디테일에 기반한 현장 관리를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
구 부회장이 올해 3월 임원세미나에서 남긴 경영철학이다. LG그룹을 떠나는 구 부회장이 어떤 현장에서 기본을 지켜나가는 경영을 하게 될지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예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