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이 경영자로서 진검승부에 들어갔다. 오너경영인으로서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를 이끌 자격이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정 부사장은 현대중공업그룹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맏아들이다. 여동생 정선이씨는 현대중공업에 적을 두고 있지 않고 남동생 정예선씨는 아직 20대로 나이가 훨씬 어려 정 부사장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유력하다.
▲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 겸 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이사. |
그의 앞에 놓인 과제는 간단하지 않다. 당장 정 부사장이 맡은 현대글로벌서비스를 키워야 한다. 2022년 매출 70조 원 달성이라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중기 목표에도 이바지해야 한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정 부사장이 2017년 11월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현대글로벌서비스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성장세를 나타낼 것으로 전망됐다.
현대글로벌서비스는 현대중공업지주의 100% 자회사로 스마트선박 개발, 선박 유지보수 서비스, 선박 기자재 공급 등이 주력 사업이다. 인력규모도 지난해 200명 정도에서 최근 287명으로 늘었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현대글로벌서비스가 올해 연결기준으로 매출 2670억 원, 영업이익 670억 원을 낼 것으로 추산됐다. 2017년보다 매출은 12.2%, 영업이익은 11.7% 증가하는 것이다,
외형으로 보면 현대중공업그룹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하지만 현대글로벌서비스는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 수익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무엇보다 정 부사장이 현대중공업그룹의 성장동력으로 만들겠다며 세운 회사다.
현대글로벌서비스는 영업이익률이 20% 안팎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 현대중공업그룹 조선사와 영업에서 사업적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현대글로벌서비스만으로는 정 부사장의 경영능력을 검증하기 어렵다는 시선도 많다.
현대글로벌서비스의 주요 사업은 현대중공업 등 그룹 계열사에서 건조한 선박을 유지보수하는 것이다. 내부 거래나 일감 몰아주기로 보일 수 있는 문제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지주는 최근 열린 애널리스트 및 기자와 간담회에서 전 세계 선박엔진의 24%를 차지한 현대중공업 선박이 현대글로벌서비스의 잠재시장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현대글로벌서비스의 매출 규모가 작은 데다 조선소 사업과 거리가 멀다는 점도 정 부사장에게는 부담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22년까지 그룹매출 70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현대글로벌서비스의 2020년 매출목표는 2조 원에 그친다.
글로벌 1위 선박 유지보수회사인 핀란드기업 바르실라조차 여러 선주와 조선사를 고객사로 두고 있지만 매출 규모가 몇 년째 6조 원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 부사장은 현대글로벌서비스를 단순한 선박 유지보수회사를 넘어선 미래형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스마트선박사업에 더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선박은 정보통신기술을 적용해 선박운항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인 배를 말하는데 현대중공업은 기존 스마트선박 개발사업을 현대글로벌서비스에 거의 대부분 넘겼다.
스마트선박은 앞으로 선박 환경규제와 안전규제가 강화하면서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돼 미래 먹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IMO의 차세대 전자항법체계 장착이 법제화되면 10년 동안 1200조 원 규모의 새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한다.
현대글로벌서비스의 성장은 정 부사장의 경영 능력을 검증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 부사장은 만 35세로 상당히 젊다. 2014년 말 인사에서 상무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상무로 승진한 데 이어 2015년 전무, 2017년 말 계열사 부사장을 맡았다. 올해 3월29일에는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5.1%를 취득해 단숨에 3대주주가 됐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정 부사장의 아버지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1988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30년 가까이 전문경영인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 기간에 현대중공업그룹은 성장의 비결로 전문경영인체제를 꼽을 만큼 자부심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정 부사장을 앞세워 현대중공업그룹이 다시 오너경영인체제로 되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만큼 정 부사장은 스스로 현대중공업그룹을 이끌어 온 전문경영인 못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권오갑 회장도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승계라는 게 지분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며 “능력, 믿음, 종업원의 지지만 있으면 지분 1~2%만으로도 오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해 정 부사장의 능력 발휘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정 부사장에게 사우디아라비아 합작 조선소 건립사업의 성공은 더욱 절실할 수 있다.
정 부사장은 현대중공업이 사우디아라비아 회사인 아람코와 바흐리, 아랍에미리트의 시추생산설비 제작회사 람프렐과 손잡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는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정 부사장은 전무 시절부터 이 조선소를 세우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수차례 방문하면서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모든 과정을 직접 챙겼다. 이 과정에서 최길선 전 현대중공업 회장이나 권 부회장의 관여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우디아라비아 합작 조선소는 2021년 완공되는데 현대중공업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신뢰관계를 맺은 데 힘입어 향후 이 지역 수주전에서도 앞서갈 것으로 업계는 바라본다.
정 부사장은 사우디아라비아 프로젝트를 통해 조선소 사업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몸으로 배우고 있다. 이 사업의 성공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매출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수도 있다.
정 부사장의 할아버지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리스 선주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우리는 300년 전에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지었던 민족이오! 돈을 빌려주시오!”라고 설득해 울산의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지었다.
정 부사장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세운다면 경영자로서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보여주며 현대중공업그룹 경영권 승계에 성큼 다가설 수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