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석 기자 stoneh@businesspost.co.kr2026-03-0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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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여성의 날’이 2018년 3월8일 국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뒤 8년이 지났다.
다만 국가가 지정한 기념일이라는 위상이 무색하게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교제폭력’을 다루는 법은 아직 독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여성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뒤 8년이 지났지만 '교제폭력'을 다루는 법은 아직 독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 AI 생성 이미지 >
8일 비즈니스포스트는 여성의 날을 맞아 처벌 공백과 보호 공백을 둘러싼 교제폭력 입법 논의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살펴봤다.
교제폭력 사건은 주로 형법상 폭행·협박,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을 통해 처리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별도의 법이 부재한 상황이다.
이에 피해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가해자와 즉각적인 분리조치가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폭행 등이 형법으로 처리될 경우 반의사불벌 조항에 따라 피해자가 보복을 우려해 처벌을 원치 않으면 수사가 종결되는 사례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교제폭력 관련 법안은 2016년 제19대 국회에서부터 지속 발의됐지만 아직 법제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3일 국회에서 한국여성의전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피해자 지원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사각지대 없이 규율·처벌하고 피해자 권리를 강화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전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고 밝혔다.
이번 개정안은 가정폭력처벌법의 적용 대상을 기존 혼인·혈연 중심의 ‘가정’ 개념에서 벗어나, 정서적·생활적·경제적 유대 또는 영향력이 존재하는 ‘친밀한 관계’ 전반으로 확장하고 교제폭력을 포함한 친밀관계 폭력을 명확히 규율하고자 마련됐다.
구체적으로 신고 시 즉각 출동·위험성 평가 의무화, 접근금지·통신·정보 접근 차단·전자장치 부착 등 실효적 임시조치 도입, 친밀관계폭력범죄 반의사불벌죄 배제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다.
앞서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도 전 의원과 같은 취지의 가정폭력처벌법 전부개정안을 발의했다.
현재 국회에 제시된 교제폭력 처벌 관련 입법 방향은 △가정폭력처벌법에 교제관계를 포함하는 방식(가정폭력처벌법 개정) △스토킹처벌법에 교제폭력을 포함하는 방식(스토킹처벌법 개정) △교제폭력처벌법 신설 등 크게 3가지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스토킹 피해를 호소하던 50대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진 ‘의정부 스토킹 살인 사건’을 언급하며 “향후 유사한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엄정 대응하라.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제도 보완에 속히 나서 달라”고 지시했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9월 스토킹·교제폭력 피해자 보호·지원 강화 방안을 마련하고, 올해 1월 별도 법 제정보다는 스토킹처벌법 개정을 통해 교제폭력을 포섭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교제폭력 피해자도 스토킹처벌법이 규정한 응급조치·잠정조치 대상에 포함하고,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보호명령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겠다는 구상이다. 상반기 국회 통과를 목표로 한다.
다만 시민사회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1월27일 성명을 내고 “교제폭력을 스토킹처벌법에 포함하겠다는 법무부의 계획은 결국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의 본질을 겨냥하기보다 지금까지와 같이 ‘땜질식’ 제도로 처리하겠다는 의미와 다름없다”며 “법무부는 지금이라도 계획을 철회하고 제대로 된 입법 방향으로 답하라”고 촉구했다.
김혜정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도 3일 기자회견에서 “교제폭력을 스토킹처럼 하나의 폭력 유형으로 손쉽게 다루려는 시도를 벗어나 종합적인 친밀한 관계 폭력 대책과 패러다임 전환으로 나아가기를 절실하게 요청한다”고 말했다.
실제 교제폭력 관련 입법 과정에서는 법 형식보다 ‘교제관계’의 개념적 모호성이 핵심 쟁점으로 논의되고 있다.
▲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가운데)이 3일 국회에서 한국여성의전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피해자 지원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진숙 의원 페이스북>
박동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은 2024년 7월 정춘생 의원이 발의한 가정폭력처벌법 전부개정안 검토보고서에서 “‘친밀한 관계인 사람’에 대한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고, ‘친밀한 관계인 사람’이 주거를 같이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하더라도 ‘가정구성원’과 동일한 내용으로 정의하는 것은 법체계 상 자연스럽지 않은 측면이 있으므로 친밀한 관계를 별도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국회입법조사처는 헌법재판소 결정(2024헌바188)을 근거로 교제폭력 입법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헌재는 지난해 9월 스토킹처벌법상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잠정조치에 관해 형벌이 아니라 예방적·보호적 조치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보호조치가 형벌이 아니라면, 유죄 확정 이전 단계에서도 위험성 판단에 따라 폭넓은 개입이 가능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교제폭력 입법에서 관계 정의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거로도 활용된다.
이에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11월 리포트를 통해 교제폭력 입법에 있어 형법처럼 엄격한 잣대로 관계를 정의하기보다 교제관계를 판단할 가이드라인으로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교제관계인지를 결정할 때 참고할 요소를 법률로 예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현재 제22대 국회에는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 박정현 민주당 의원, 황정아 민주당 의원, 이인선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교제폭력처벌법 제정안 4건이 계류 중이다.
이들 제정안은 모두 교제관계 정의, 신고의무 부과, 응급조치 및 긴급응급조치, 반의사불벌 적용 배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종합하면 정부는 스토킹처벌법 개정을 통한 신속한 제도 보완을 추진하고 있고, 여야 일부 의원들은 가정폭력처벌법 전면 개정 또는 별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입법 방식은 갈리지만 친밀한 관계 폭력에 대한 보호 공백을 해소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다.
다만 교제관계의 정의와 법체계 형식 등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성의 날이 법정기념일이 된 지 8년이 지났지만, 교제폭력 입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