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마츠카 겐이치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사진)가 15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리는 롯데그룹 2026년 상반기 VCM(옛 사장단회의) 행사 참석을 위해 이동하고 있는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2026년 1월15일 낮 12시30분.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1층 로비는 평소와 다른 공기가 감돌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화려한 대리석 바닥 위로 롯데그룹의 명운을 쥔 계열사 대표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1년에 두 번 롯데그룹 계열사 대표가 모두 소집돼 그룹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VCM(옛 사장단회의)은 늘 긴장감이 흐르는 자리다. 하지만 올해의 분위기는 유독 차갑고 경직돼 있었다.
로비를 가로지르는 대표들의 발걸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빨랐고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는 어떠한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이번 회의의 핵심 화두인 ‘인공지능(AI) 전략’과 각 계열사의 생존 복안을 묻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정현석 롯데백화점 대표는 쏟아지는 질문을 뒤로한 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어 서정호 롯데웰푸드 대표, 차우철 롯데마트·슈퍼 대표, 신민욱 롯데GFR 대표, 김호철 코리아세븐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거나 시선을 먼 곳으로 두며 걸음을 재촉하는 장면이 마치 반복 재생되는 화면처럼 이어졌다.
이날 현장에서 느낀 가장 생경한 풍경은 다름 아닌 ‘낯섦’이었다.
취재진이 얼굴을 즉각 알아보지 못하는 인물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현장에 나온 관계자들조차 “잠시만 기다려달라, 확인해서 알려주겠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그룹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해 2년 연속 실시한 인적쇄신의 결과물이다.
신 회장은 2024년 인사에서 계열사 대표 21명을 교체한 데 이어 2025년 인사에서도 20명의 수장을 바꿨다. 수년 동안 롯데그룹을 지켜온 ‘익숙한 얼굴’들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새 얼굴’들은 변화에 대한 기대감보다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린 듯 보였다.
물론 모든 답변이 침묵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인사에서 승진한 이원택 롯데GRS 대표는 AI 전략을 묻는 말에 “푸드테크를 강화하겠다”는 짧지만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CJ 출신으로 외부 수혈된 김종열 롯데컬처웍스 대표 또한 “트렌드를 읽고 미리 세상을 리드하겠다”며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이들도 짧은 답변을 뒤로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 서정호 롯데웰푸드 대표이사(사진)이 15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로비를 지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회의실 밖으로 전해진
신동빈 회장의 메시지는 예상대로 매서웠다. 과거의 일방적인 ‘꾸짖음’과 결도 달랐다.
신 회장의 발언에는 질타보다 더 무거운 ‘자기반성’과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과거의 성공 경험에 안주하지 말라”는 주문은 단순한 훈계를 넘어 지금의 방식으로는 롯데라는 거함이 침몰할 수 있다는 실존적 위기감의 토로이자 지금 롯데그룹이 서 있는 발 밑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부터 처절하게 돌아보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롯데그룹이 직면한 지표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한때 그룹의 캐시카우였던 화학 부문은 글로벌 업황 악화와 공급 과잉 속에서 수천억 원대의 적자를 기록하며 그룹 전체의 재무적 부담으로 떠올랐다. 유통 부문 역시 ‘전통의 강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고전 중이다. 이커머스의 공세 속에서 오프라인 콘텐츠 강화를 외치고 있지만 소비자의 마음을 돌려세울 만한 압도적인 성과는 아직 요원하다.
그룹을 지탱하던 두 축이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에서 리더들의 표정이 밝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빠른 걸음과 굳은 표정, 그리고 취재진의 질문을 외면한 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던 리더들의 뒷모습은 현재 롯데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5일 롯데월드타워를 채운 것은 화려한 미래 전략에 대한 기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묵직한 침묵이었을 지도 모른다.
롯데그룹의 진짜 위기는 회의장에 놓인 보고서 속 숫자보다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서둘러 자리를 피해야 했던 리더들의 무거운 어깨에서 더 짙게 읽혔다. 장은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