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충희 기자 choongbiz@businesspost.co.kr2024-10-0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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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국민의힘이 추진하는 여야의정 협의체가 출범조차 못하고 있다. 의료계가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의 주요 전제 조건으로 내건 2025년 의대 증원 백지화를 놓고 정부가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급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의료공백'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정부가 의대 증원을 발판 삼아 달성하려는 의료개혁 정책의 동력도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9월2일 서울 영등포구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의료센터를 찾아 의료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국민의힘>
3일 정치권에 따르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야심차게 추진한 여야의정 협의체가 출범 자체부터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한 대표는 의료개혁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독대 요청을 했으나 사실상 거절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9월24일 열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지도부의 당정만찬에서도 의료개혁을 포함한 민감현안이 논의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이렇다할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한 대표는 만찬 다음날인 25일 국회에서 기자들을 만나 "현안 관련 이야기가 나올만한 자리는 아니었다"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중요한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의료계의 대화 참여를 설득해온 한 대표로서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야당에서도 거센 비판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의료대란대책특위는 입장문을 내고 "의료계 위기가 심화되고 국민 생명과 건강이 위협받고 있는 시점에서 그저 밥만 먹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라며 "독대 자리가 아니면 말도 못 꺼내는 여당 대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한민수 민주당 대변인도 논평에서 "제대로 된 고언을 전하지도 못하는 여당이 야당이 노력하는 여야의 협의체 구성 제안은 갈등 조장이라고 비난하며 폄훼하느냐"고 쏘아붙였다. .
한 대표를 비롯해 의료계와 대화를 바라는 국민의힘은 의대 증원 백지화와 관련해 정부 설득을 전제로 전공의, 개업의 의대교수 등 의료계 각 주체들과 물밑대화를 진행했으나 이러한 노력이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의료계는 여야의정협의체 구성을 위해 △2025년 의대증원 백지화 △정부의 사과 등을 주장한다. 반면 정부는 '조건을 걸지 말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안나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지난달 13일 8개 의사단체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는 현시점에서 협의체 참여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며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인정하고 전향적인 변화를 보여달라"고 말했다.
▲ 윤석열 대통령(오른쪽)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4일 용산 대통령실 분수정원에서 당정만찬을 마친 뒤 산책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하지만 정부는 의대증원을 놓고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장상윤 대통령비서실 사회수석비서관은 최근 브리핑을 통해 "정부의 태도변화와 같은 조건을 내걸어 문제해결을 미룰 것이 아니라 우선 대화의 장에 나오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라며 "이미 입시가 진행 중인 2025학년도 의대정원은 조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이처럼 의료계와 정부의 대립이 장기화 되는가운데 이미 '응급실 뺑뺑이'로 대표되는 의료공백의 여파가 내년부터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방재승 전 의대교수협의회장은 최근 CBS라디오 김현정의뉴스쇼에 출연해 "전문의가 배출되지 않고 의대생 7500명이 몰려 의료교육계가 무너지면 사태가 심각해질 수 있다"며 "의료 붕괴는 2025년 3월부터 진짜 시작"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밀어붙이는 2025년 1500 명의 의대생 증원을 의료교육 시스템이 감당하지 못하면서 의사배출이 힘들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의료 붕괴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말을 종합하면 한해 3천명 수준의 의대생을 수용할 수 있는 교육현장에 2025년 신입생 4500명과 2024년 휴학생 3천 명을 합쳐 7500명이 교육현장에 몰리게 되면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는 우려가 많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가 5월 전국 30개 의대교수 776명을 대상으로 교육여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입학과 진급에 맞춰 학교 강의실 등 건물이 적절하게 준비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95%인 739명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의대생 교육을 담당할 교원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96.5%인 749명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특히 지방의대에서는 전공의 이탈로 업무부담이 커진 상태에서 의대생까지 늘면 의료 체계 자체가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원이 기존 49명에서 200명으로 늘어난 충북대 의대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현재 충북대 의대에서는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는 물론 교수의 사직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충북대병원·의과대학 비상대책위원회측은 지난달 9일 삭발식과 단식투쟁에 들어가면서 "무리한 증원은 교육을 아예 할 수 없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대로라면 의사를 증원해 기초 의료와 사각지대에 놓인 지방 의료를 되살리겠다는 정부의 의료개혁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 충북대병원·의대 비상대책위원장 등 의대교수 3명이 9일 오후 충북대 의과대학 본관 앞에서 의대 증원 반대 입장을 표명한 뒤 삭발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의사 출신인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단기적으로 앞으로 몇 년 간 극심한 의사 부족과 병원 도산으로 인한 의료공백에 시달리고 장기적으로는 수십년간 공들여 구축해 온 값싸고 질 좋은 K-의료시스템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며 “정부는 강경일변도 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 정책의 핵심은 의대 증원을 통해 의사 숫자를 늘려 필수의료를 회복하고 지방의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2000년 의약분업으로 축소된 뒤 동결된 의대정원부터 늘려 필수의료와 지방의료를 담당할 의료인력을 확보하자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또 정부는 2035년에 의사 1만 명이 부족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의대정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본다.
장상윤 사회수석비서관은 8월29일 인천 중구에서 열린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해 "이미 지역 의료인프라 부족문제는 좌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지금 의대생을 증원해도 반영되는 것은 10년 후로 지금 증원하지 않으면 10년 뒤엔 아무런 대책이 없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료 공백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이런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을 밀고나갈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많다.
더구나 여론조사 기관에서 나오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를 보이는 결과가 많아 의대 증원을 바탕으로 한 의료개혁 정책을 밀어붙이는데 정부가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1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긍정평가는 20%에 불과했다. 이 여론조사 기관에서 나온 윤 대통령 지지율은 지난 4월 총선 이후 20%대를 벗어나지 못했고 7월3주 차 조사부터 하락세를 보이다 2024년 5월에 기록했던 최저치(21%)를 경신한 것이다.
특히 부정평가의 이유에서 '의대정원 확대'가 18%로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조사는 한국갤럽 자체조사로 10일부터 12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1002 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 무작위 추출을 통한 전화조사원 인터뷰(CATI)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2024년 6월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기준 지역·성·연령별 가중치(셀가중)가 부여됐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갤럽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이처럼 국민여론까지 악화하자 태도를 바꾸려는 분위기도 감지되지만 의료계가 따라줄 지는 미지수다.
정치권에 따르면 대통령직속 의료개혁특위는 최근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를 구상하기 위한 운영계획을 심의했다. 추계기구는 의료 전문가 10여 명이 활동하게 되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을 의사단체가 추천한다.
이는 '2025년 2천 명 의대증원 규모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의료계 지적을 수용한 조치로 풀이된다.
정부는 추계기구 운영을 위해 의료계의 참여를 촉구할 것으로 보이지만 의료계에선 기존 요구사항이 선행돼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대한의사협회는 9월30일 입장문을 내고 "정부가 잘못된 의료정책을 강행해 의료대란을 초래한 서에 먼저 사과해야 한다. 의료계가 신뢰할 수 있는 협의가 될 수 있도록 분명한 입장변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어떤 논의에도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개혁을 비롯해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이는 주요 정책의 동력들이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은 대통령과 여당을 향해 "의료붕괴로 국민이 죽어가는데 정부 정책의 잘못을 빨리 바로잡지 못하면 국민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요지로 비판했다.
또 오는 7일부터 시작되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정부의 의대 증원과 관련한 비판이 봇물을 이룰 것으로 예상돼 의대 증원을 출발로 하는 정부 의료개혁 정책의 동력의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조충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