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일렉트론을 비롯한 일본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한국 메모리반도체 제조사의 HBM 투자 확대에 수혜를 노리고 있다. 도쿄일렉트론 반도체 생산장비 사진. |
[비즈니스포스트] 일본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를 적극 늘리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고대역폭 메모리(HBM) 호황에 맞춰 수혜를 키우려는 목적으로 풀이된다.
수 년 전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부품, 장비 공급망을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며 한국을 압박했지만 이제는 협력을 강화하고 있어 전세가 역전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22일 닛케이아시아를 비롯한 외신을 종합하면 도쿄일렉트론을 비롯한 일본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최근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공급 확대를 노리며 한국 내 투자를 늘리고 있다.
도쿄일렉트론은 2026년 경기 용인시에 새 연구개발센터를, 토와는 내년부터 천안에 신규 생산공장을 운영한다는 계획을 두고 있다. 디스코 역시 한국에서 채용 규모를 확대했다.
이들 기업은 모두 한국 메모리반도체 기업의 HBM 생산 확대에 따른 수혜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이 HBM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HBM은 엔비디아 등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의 제품에 주로 쓰이는 고사양 메모리반도체다. 향후 수 년 동안 고객사 수요가 급증하며 폭발적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이에 맞춰 HBM 생산 투자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장비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를 타고 일본 장비 기업들이 동반 성장할 기회를 찾고 있는 셈이다.
닛케이아시아는 “도쿄일렉트론 한국 법인은 지난 5년에 걸쳐 직원 수를 2배로 늘렸다”며 “토와 역시 한국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토와 관계자는 닛케이아시아에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변동성이 있지만 HBM 시장은 분명한 성장이 예상된다”며 “고객사와 가까운 곳에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HBM 수요 증가로 메모리반도체 시장에 성장세가 되돌아오며 SK하이닉스 및 삼성전자와 일본 장비 업체들의 협업 관계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일본 반도체 장비 제조사들은 최근 미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주요 시장이었던 중국에 고사양 제품을 수출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한국 고객사들의 HBM 투자 확대에 대응하는 것은 이를 만회하는 데도 중요하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부품, 장비 분야의 강국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 과거에는 일본 정부가 이를 외교적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2019년 일본 정부는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품목을 수출 규제 대상에 포함했다. 한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체에 필요한 핵심 소재 공급을 제한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판결에 반발해 이러한 조치를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 소재 공급망을 협상 카드로 활용한 셈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기업에 큰 차질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는 일본이 반도체 소재와 부품, 장비 분야에서 강력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국내 반도체업계가 실감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이 지난해 초 해당 품목의 수출 규제를 완화한 데 이어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를 적극 확대하는 것은 이전과 상황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시각이 나온다.
이제는 일본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압박에 따른 영향을 만회하고 HBM 시장 성장에 기회를 잡기 위해 한국 고객사에 협력을 추진하기 시작하며 전세가 역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닛케이아시아는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 직원의 말을 인용해 “한국과 일본 정부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점도 일본 기업들에 도움이 되는 요소”라며 “한국의 여론을 걱정하지 않고 투자를 추진하기 쉬워졌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역시 요코하마에 반도체 패키징 연구개발 센터를 신설하며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등 반도체 산업에서 양국 사이 협력은 점차 강화되고 있다.
SK하이닉스 및 SK스퀘어도 일본과 미국 등 해외 소재와 부품, 장비 기업에 투자하는 펀드에 출자하며 일본 기업과 협업 기회를 꾸준히 찾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HBM 수요 증가와 같은 성장 기회를 잡으려면 일본 기업들과 협력에 더 힘을 실어야만 한다. 핵심 장비 공급망에서 일본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사태 이후로 자국 소재와 부품, 장비 업체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펼쳐 왔다. 그러나 단 수 년 만에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닛케이아시아는 “한국은 전체 반도체 장비의 약 20%만을 자국에서 조달하고 있다”며 “산업 특성상 신규 기업이 진입하기에는 기술 장벽이 높은 분야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SK하이닉스 및 삼성전자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협력 강화가 양측에 ‘윈-윈’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닛케이아시아는 HBM 시장이 성장할수록 중장기 관점에서 현지 장비와 소재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노력도 힘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