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준 기자 hjkim@businesspost.co.kr2024-07-14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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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최근 재건축·재개발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보상금 문제로 시끄러워지는 사례가 왕왕 발생한다. 때로는 보상금 규모가 수백억 원까지 커지면서 논란을 빚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궁궐이나 관청을 짓는 과정에서 철거 주택의 보상 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되곤 했다. 선조들 역시 민가 철거에 적절한 보장 수위를 두고 적잖은 고민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 적정한 재개발 보상금 규모를 둘러싼 논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사진은 서울 장위10구역 조감도. <서울시>
14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보상금을 놓고 갈등이 심각했던 서울시 성북구 장위10구역 재개발 공사가 2025년 착공을 시작하는 등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시는 2일 제3차 정비사업 통합심의위원회를 열고 ‘장위10구역 주택재개발사업(변경)’, ‘연희1구역 주택재개발사업(변경)’, ‘양동제4-2·7지구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신규)’ 등 3건의 사업 시행을 위한 각종 심의안을 통합해 각각 통과시켰다.
장위10구역은 연희1구역과 함께 주택정비형 재개발 사업 가운데 통합심의를 통해 사업계획이 변경된 첫 번째 현장이 됐다.
장위10구역은 2008년 4월 재정비촉진구역으로 지정된 뒤 2017년 관리처분인가까지 획득했으나 보상비를 둘러싸고 주변 종교시설과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사업 진척이 매우 더뎠다.
전광훈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는 사랑제일교회는 감정가인 82억 원을 거절하고 563억 원의 보상금을 요구하며 버텼다. 사랑제일교회는 조합에서 제기한 명도소송에서 3심까지 패배했음에도 부지를 비우지 않았다.
결국 재개발 조합이 사랑제일교회 부지를 재개발 계획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교회는 보상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보상금을 둘러싼 갈등은 통상적으로 재건축보다 재개발 사업장에서 불거지는 일이 많다. 이는 재건축과 재개발의 보상금 산정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재건축 사업에서는 시장 가격을 어느 정도 반영해 보상금이 결정된다. 보상금이 다소 아쉽게 나오더라도 매도 청구 소송 등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 산정이 진행되면 적당한 가격을 챙길 수 있다.
반면 재개발 보상금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기존 거주자들이 기대만큼 보상을 받기 힘들다. 거주민의 상황에 따라 영업보상비, 이주 정착비, 이사비, 주거 이전비 등이 추가로 주어지기는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시세에 맞는 가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개발 보상 문제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조선시대 기록을 살펴보면 궁궐 및 관청을 새로 짓거나 확장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보상을 내리고 그 보상의 적정성을 논의했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이 전제국가였던 점을 고려하면 다소 의외인 부분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8년(1462년) 기록에 따르면 세조는 나라의 재산을 관장하는 호조에 집을 철거하는 사람에게 쌀 1석, 보리 4석을 내리고 궁궐을 짓고 남는 나무와 기와 등을 보상으로 내리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좌부승지로 재직하고 있던 김경광이 철거된 민가가 많아 모든 집에 재목과 기와를 줄 수 없어 보상을 쌀로 대신하는 것이 낫다고 요청하니 세조는 그것을 그대로 따랐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중건한 경복궁의 모습. <문화재청>
다만 세조는 곡물로 보상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이후에도 노동력 징발을 면제해 주는 등 추가로 보상 조치를 내리며 민가 철거에 따른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궁궐 짓기를 좋아했다고 알려진 광해군 시절의 기록을 살펴보면 궁을 짓는 과정에서 집이 철거된 집주인에게 집값을 신속히 보상하라고 광해군이 직접 신하들을 재촉하는 내용도 살펴볼 수 있다.
일본 와세다대가 소장하고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서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 주택 철거 및 보상금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경복궁영건일기는 경복궁 중건을 전담한 관청인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초기낭청(草記郎廳)으로 일했던 원세철과 김석근이 1865년 4월1일부터 공사가 마무리된 1868년 7월4일까지 공사장에서 벌어진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했던 일기다.
서울역사편찬원은 2020년 경복궁영건일기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내용을 엮은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을 제작한 바 있다.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래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 중건을 앞두고 민가 철거 및 보상금 문제가 논의됐다.
민가를 무상으로 몰수할 것인가, 보상금을 지급할 것인가를 놓고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토론이 이어진 결과 1865년 4월12일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향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보상금 산정 기준은 기와집 1칸 10냥, 초가집 1칸 5냥, 임시가옥 2냥으로 결정됐으나 국왕이 한성에서 온양행궁까지 다니던 길인 어로에 불법적으로 집을 지은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주택에 일괄적으로 보상 기준이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경복궁 근처라는 좋은 위치를 차지한 주택에는 고가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장동(서촌·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일대)에 위치한 90칸 규모의 박 진사의 기와집을 사들이는 데에는 2600냥이 들었다. 보상금 산정 기준에 따르면 900냥이 적정 금액임에도 3배 가까운 비용을 지급한 것이다.
국가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사들인 집은 매동(서촌·서울 종로구 통의동 일대)에 있던 홍난섭의 대저택이다. 흥선대원군은 160칸이 넘는 이 집을 자그마치 4500냥에 구매했다.
그다지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던 홍난섭이 경복궁 근처에 대저택을 갖고 있었던 것은 홍난섭의 할아버지인 홍익돈이 영조의 손녀사위였기 때문이다. 홍익돈의 부인은 사도세자의 서녀이기에 원래 청근현주라고 불렸으나 이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는 과정에서 격이 상승하며 호칭이 청근옹주로 바뀐 바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7년(1771년) 12월12일 기록을 보면 영조가 손녀인 청근현주의 집을 수리하되 너무 심하게 사치하게 하지는 말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홍난섭의 저택이 160칸에 이르렀던 것을 보면 청근현주가 사치의 기준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의 저택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영건일기에는 민가 철거 과정도 자세하게 나와 있다.
민가 철거는 도로를 넓히기 위해 1865년 경복궁 동쪽 성 밑 민가부터 시작됐다. 1차 철거 이후로도 도로가 여전히 좁았기 때문에 기와집 85칸, 초가집, 592칸, 임시가옥 10칸이 추가로 철거됐다. 이어 문소전 터 뒤편 담장 밖에 있던 21채, 140칸에 이르는 초가집이 해체된다.
다음 해인 1866년에도 철거 작업은 지속됐다. 2월19일에는 종친부 주변에 있던 민가 104채에 철거 보상금이 지급됐다. 4월에는 최대 규모의 민간 가옥 철거 작업이 시작됐는데 경복궁 주변에서 기와집 1872칸, 초가집 2553칸, 임시가옥 77칸 등 모두 합쳐 4502칸의 민가가 없어졌다.
백성에게 지급된 철거 보상금은 모두 합쳐 3만3833냥5전이다. 보상금 지급을 위한 재원은 원납금에서 충당됐다.
원납금이라는 명칭에는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백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낸 돈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납부에 강제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백성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낸 돈이 아이러니하게도 백성들의 거주지를 철거하는 비용으로 투입된 셈이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