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시드니 시내 길거리의 공유전기자전거에는 모두 헬멧이 부착돼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시드니(호주)=비즈니스포스트] 호주 시드니 도심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공유자전거를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도 있는 ‘라임’ 등 익숙한 브랜드도 눈에 띈다.
하지만 한국과 시드니의 공유자전거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시드니의 공유자전거는 모두 사용자를 위한 헬멧이 부착돼 있다는 것이다.
5월13일부터 17일까지 호주 시드니 거리 곳곳을 거닐며 공유자전거를 보고 있자니 두 나라의 퇴직연금 제도가 떠올랐다.
▲ 호주 시드니의 랜드마크 오페라하우스. <비즈니스포스트> |
◆ 보통사람이 연금부자가 되는 나라 호주, 비결은 '슈퍼애뉴에이션'
한국의 퇴직연금은 개인이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제도에 디폴트옵션 등 ‘연금 선진국’ 호주와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그 퇴직연금이 노후를 안전하게 지켜줄 ‘헬멧’까지 제공하느냐는 다른 이야기다.
“보통 직장인으로 근면성실하게 일하다 퇴직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시드니에 지점을 두고 있는 한국 금융사 한 주재원은 호주의 퇴직연금제도를 한 마디로 이렇게 평가했다.
퇴직연금으로 연간 수익률 5~7%를 복리로 쌓는 ‘연금부자’가 과장된 수식어가 아닌 실제 주변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례라는 것이다.
호주에서 만난 한국인 주재원들, 현지 금융사와 슈퍼애뉴에이션(퇴직연금) 관련 협회 관계자들은 시드니 곳곳의 해변가만 가도 바로 그 연금부자 ‘주인공’들을 볼 수 있다고 귀뜸했다.
남반구의 강렬한 햇살과 아름다운 풍광이 유명한 본다이비치, 맨리비치, 레드리프비치 등에는 여유롭게 브런치와 수영을 즐기고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이다.
꼭 해변가까지 가지 않아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장에서, 람세스전이 한창인 시드니 호주박물관에서, 도심 시니어스쿨의 커뮤니티에서 문화생활과 운동을 즐기는 어르신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슈퍼(Super, 최고의)’라는 이름을 내건 호주의 퇴직연금 '슈퍼애뉴에이션'이 그 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커스틴 사무엘스 호주자산운용협회(FSC) 연금&혁신 담당자는 “연금 백만장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슈퍼애뉴에이션은 확실히 은퇴 뒤 생활의 질과 선택지를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정부 재정으로 운영하는 노령연금은 이런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성공의 사회적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호주 사람들은 슈퍼애뉴에이션에 관한 신뢰도가 높다.
▲ 호주 시드니의 금융중심가 마틴플레이스. 도심지의 활발함 속에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슈퍼애뉴에이션은 호주의 단단한 금융시스템 속에서 진정한 퇴직연금으로서 역할을 한다. <비즈니스포스트> |
호주에서는 근로자가 월급의 일정 부분을 슈퍼애뉴에이션에 추가로 납입하고 싶다는 내용의 근로계약을 맺는 사례도 적지 않다. 슈퍼애뉴에이션은 퇴직 뒤 노후생활을 보장할 자금이라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데다 세금혜택까지 받을 수 있는 ‘좋은 투자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주퇴직연금협회(ASFA) 통계자료에 따르면 호주는 2023년 가입자 6명 이상인 퇴직연금펀드의 고용주 적립금이 전년보다 13% 증가하는 동안 개인의 슈퍼애뉴에이션 적립금도 8% 늘어났다.
근로자가 그만큼 더 많은 적립금을 자발적으로 납입했다는 것인데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하거나 일시금으로 수령해 단기적 자금융통에 사용하는 비중이 높은 한국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시드니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는 “시드니에서도 부동산 투자나 내 집 마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똑같다”면서도 “하지만 동시에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슈퍼애뉴에이션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는 데에도 관심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에 관한 호주 사람들의 굳건한 신뢰를 현지에서 보고 듣다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슈퍼애뉴에이션은 어떻게 호주 근로자들의 노후 보장책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을까? 한국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 호주의 퇴직연금 제도인 슈퍼애뉴에이션은 개인에게 자금 운용을 맡기는 'DC'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진은 시드니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호주 액티브슈퍼펀드의 광고 포스터. <비즈니스포스트> |
◆ ‘Your Future, Your Super’, 단단한 제도와 시장의 윈-윈
호주는 1992년 근로자가 의무적으로 가입하고 고용주가 기여금을 납입하는 퇴직연금제도인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을 도입했다. 한국의 국민연금 같은 노령연금만으로든 노인 빈곤율 등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호주는 슈퍼애뉴에이션을 도입하기 전에는 노령연금 외 가입을 의무화한 연금제도는 없었다. 지금은 노령연금-슈퍼애뉴에이션-개인연금의 3층 연금제도를 구축하고 있다.
슈퍼애뉴에이션은 적립금의 규모를 비롯해 수익률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성공사례로 유명하다.
2023년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의 연간 수익률은 9%대를 보였다.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은 10년, 20년, 30년 수익률이 모두 7%대를 넘고 있다.
한국 퇴직연금의 80%에 가까운 자금이 수익률 1~3%의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쏠려 있는 것을 고려하면 차이가 크다.
호주 정부는 현재 ‘Your Future, Your Super(당신의 미래, 당신의 퇴직연금)’라는 기치를 내걸고 슈퍼애뉴에이션의 수익률과 투명성 증대를 위한 장기적 관점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슈퍼애뉴에이션의 수익률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다.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은 사적연금이지만 18세 이상 근로자면 모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적용대상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시간제 근로자와 일부 자영업자 등으로 대부분의 근로자를 포함한다.
한국은 아직 퇴직금 제도와 퇴직연금 제도가 공존하고 있지만 호주는 근로자면 누구나 퇴직연금을 보유하게 된다.
고용주는 근로자 퇴직급여로 연봉의 11%, 2025년부터는 12%를 호주 국세청에 적립해야 한다. 호주는 국세청과 호주건전성감독청, 호주투자위원회 등 3개의 관리기관이 슈퍼애뉴에이션 제도를 공동 관리,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강제성과 투명성을 강화했다.
▲ 호주 시드니 서큘러퀘이의 모습. 노후를 즐기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매튜 린든 호주산업형기금협회(SMC) 전략총괄대표는 “호주도 퇴직급여 적립금 비중을 9%에서 12%까지 끌어올리는 데 10년이 걸렸다”며 “정부가 슈퍼애뉴에이션의 사회 보장 역할을 키우겠다는 결정으로 오랜 기간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바로 이런 보편성과 강제성은 호주 퇴직연금제도의 핵심 성공비결로 꼽힌다.
또 하나는 자본시장의 탄탄함이다. 호주는 주식시장을 비롯해 부동산, 광물 등 다양한 산업군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슈퍼애뉴에이션 펀드의 자금들도 여기에 한 몫을 하면서 ‘윈-윈’하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
호주는 슈퍼애뉴에이션 적립금의 큰 비중이 주식시장과 채권, 부동산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군에 투자돼 자본시장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호주의 대형 슈퍼애뉴에이션 펀드들은 실제 시드니의 우량 건물자산들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호주 건전성감독청(APRA)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호주 슈퍼애뉴에이션 회원 총자산 규모는 2조2600억 달러(약 2050조 원)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현금성 자산으로 운영되는 자금의 규모는 9%에 그친다.
호주 국내(22%)와 글로벌(26%) 증시에 투자된 비중이 가장 높다. 비상장 주식(5%)까지 더하면 증시에 투입된 자금이 53%에 이른다. 이밖에 국내외 채권(21%), 인프라(8%), 상장·비상장 부동산(7%), 기타(2%)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금 흐름을 만들고 있다.
▲ 노스 시드니지역에서 바라본 시드니 항구의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5월 호주의 햇살은 익히 들었던 대로 강렬하고 화창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로 꼽히는 시드니의 ‘하버뷰’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은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이 도입 30여 년 만에 국민 노후생활의 안전망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는 것이었다.
호주에서는 그런단다. 퇴직연금을 중도에 인출해 쓰는 건 인생이 끝장난 사람이나 할 일이라고.
한국도 올해 퇴직연금제도 도입 20년차를 맞았다.
한국의 퇴직연금도 더욱 단단하게 자라서 10년 뒤엔 국민연금을 확실하게 보완하며 노후 생활의 안전장치 '헬멧' 역할을 충실히 하기를 기대한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