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월25일 독일 서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도심에 자리잡은 유로 통화 조각상 옆으로 시민들이 걷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프랑크푸르트에 본사를 두고 있다. 최근 유럽경제의 주축인 독일경제가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독일이 '유럽의 병자'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유럽 경제의 기관차인 독일이 갑자기 ‘유럽의 병자’ 소리를 듣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전분기 대비 –0.3%,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3분기에는 0%, 제자리 걸음을 했다. 국내총생산이 2분기 연속 마이너스이면, 경기침체로 규정된다. 독일은 간신히 경기침체 국면을 기술적으로 피했다. 3분기도 애초에는 –0.1% 성장이 예상됐으나, 0%로 막으면서 경기침체 국면을 피한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최대 경제인 독일은 2023년에 –0.1% 성장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피하지 못했다. 독일의 주요 경제심리지수인 이포인덱스는 올해 1월에 더 떨어져, 독일 경제가 당분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보여준다.
미국이 지난해 2.3%, 일본이 2.2%, 프랑스가 1%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건실한 경제의 대명사였던 독일의 추락이 도드라진다. 심지어 유럽의 만성적 병자인 영국과 이탈리아도 각각 0.3%와 0.8%를 거둬 독일과 달리 마이너스 성장을 피했다.
독일 경제를 두고 지난해 8월부터 ‘유럽의 병자’라는 지적이 나왔다. 독일의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 현실화되자, 이런 지적은 더욱 회자되고 있다.
독일 경제 부진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에너지 가격 인상과 중국으로 수출 부진이 지목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갑싼 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독일 산업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소비자의 지출이 위축됐다.
최대 수출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경제가 부진한 데다, 중국이 서비스업 비중을 높이는 내수 시장 강화 정책으로 독일 제조업의 수출품 수요가 줄었다. 에너지와 중국 시장과 관련된 부진은 일시적이라서, 올해 독일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벗어나 0.4% 성장이 예상되며 회복될 것이라고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는 예상했다.
독일 베렌베르그은행의 경제분석가 홀게르 슈미에딩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독일의 유럽의 병자가 아니다”며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시장, 다른 선진국들이 부러워하는 재정적 입지를 가지고 있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시적인 것이다”고 평했다. 그 역시 독일 경제의 부진을 중국과 러시아 에너지 문제로 들면서 독일이 겪는 일시적인 고통이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독일 경제의 올해 부진은 단순한 경기 순환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지난 1999년 이코노미스트가 독일을 ‘유럽의 병자’로 지칭한 진단이 이번에는 정말로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퍼지고 있다. 1999년 당시 독일은 통일 부담으로 인한 비용으로 높은 실업률 등으로 침체에 빠졌지만, 통일 부담이 가시고 유로존 통합의 효과가 본격화되면서 독일 경제는 놀라운 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독일 경제 부진은 그런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 즉 사업 모델과 경제 모델이 한계에 봉착한 결과라는 진단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한계를 타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 경제의 강점이던 제조업 중심 모델이 수명이 다했는데, 이를 타개할 독일의 혁신을 뒷받침할 인프라나 사회적 장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페테르 보핑게르 독일 부르즈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교수는 유럽의 진보적인 평론지 ‘소셜 유럽’에 ‘독일의 진정한 경제적 질환’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수출 중심, 제조업 중심, 자동차 산업이라는 3개 축으로 가동되는 독일 경제 모델이 수명이 다했는데, 이를 타개할 사회적 장치가 없다고 우려했다.
보핑게르 교수에 따르면, 독일 국내총생산의 47% 비중을 갖는 수출은 급속한 글로벌리제이션 환경 하에서는 독일 경제의 활황을 이끌었으나, 지금처럼 글로벌리제이션이 퇴조하고 미국이 선도하는 보호주의 조류에서는 더 이상 성장 엔진이 아니다.
독일 경제의 중추인 제조업은 전체 산업에서 부가가치 비중이 19%로, 미국의 11% 등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다. 이런 강력한 제조업은 수십년 동안 성장의 견인차였으나, 최근 높은 에너지 가격과 탈탄소화 경제 수요는 서비스업 중심의 국가에 비해 그 부담을 높이고 있다.
특히 독일에서 디지털 플랫폼의 결여는 치명적이다. 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따르면 미국은 디지털 플랫폼 글로벌 시장에서 약 80%, 중국은 17%의 비중을 차지하나, 유럽은 고작 2%에 불과하다.
독일 제조업의 상징인 자동차 분야는 최근 중국 시장 의존이 심했다. 독일의 자동차 생산은 2017년 정점을 치고는, 현재는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전 세계적으로 전기자동차의 보급, 특히 중국에서 전기자동차 생산과 판매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폭스바겐 등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내연기관에 너무 오랫동안 의존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서비스 중요성을 평가절하해왔다.
결국 독일 경제의 모델은 한계에 달했고, 이를 극복하려면 혁신이 필요하다. 단순히 규제완화와 세금 삭감 등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구축을 위한 마중물이 필요하다. 독일의 제조업을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고, 부채를 발생해서라도 공공투자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독일 사회에 내재한 균형재정에 대한 신화와 규칙은 공공투자에 대한 정부 재정의 역할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지난 12월 2024년도 예산을 두고 국내총생산의 0.35%를 넘는 예산적자를 금지한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올라프 숄츠 총리의 3당 연정은 예산 위기에 직면해 한 달 간의 협상 끝에 녹색에너지 보조금을 삭감해, 예산적자 규정을 준수키로 했다.
헌재의 이런 결정에서 보듯이, 독일에서는 정부가 공공부채를 통한 재정의 역할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균형재정이 헌법에 명기될 정도로 독일에게는 역사적 교훈이 있다.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하이퍼인플레이션 사태에 대한 정부의 무능 등을 자각하고는, 균형재정을 위기에 대처하는 최후의 보루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경제의 출현 등 경제 환경이 급속히 재편되면서 이에 대처하는 독일 경제와 기업들의 부진은 미국이나 중국 기업과 대조된다.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산업과 기술은 자본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정부 지원 등 공공투자로도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핑게르 교수는 “처방은 공공부채를 성장의 엔진으로서 쓰는 것이다”라며 “단순히 세금 삭감과 소득 이전이 아니라 국내수요 및 신기술 출현과 적용을 자극할 공공부채 활성화”라고 진단했다. 이런 주장은 수명이 다한 독일 경제의 모델을 혁신할 사회적 장치의 결여라고 요약된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독일 경제의 부진은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와도 관련되어 있다. 독일 경제 부진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에너지와 중국 시장 문제는 지정학적 격변의 산물이다.
독일이 의존하던 값싼 가스 공급을 차단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와 충돌하는 러시아의 도전으로 발발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가한 경제제재에서 버티면서 중국과 손을 잡고 다극화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러시아나 러시아의 영향권인 동방은 독일 경제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시장이었다. 독일 경제가 1990년대 말 유럽의 환자라는 진단에서 탈출한 배경은 사회주의권 붕괴로 동부유럽의 시장이 열리고, 이 시장들이 독일의 독무대가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나 그 영향권은 독일 경제에게는 값싼 에너지뿐만 아니라 독일 제조업의 잠재적 시장이었다. 우크라이나 경제는 독일 경제에게 러시아라는 중요한 원료 공급지이자 시장을 박탈해가고 있다.
중국 시장의 부진도 같은 지정학적 변화의 차원이다. 미-중 대결로 인해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디커플링은 시간이 갈수록 독일 제조업의 중국 수출을 제한할 것이 분명하다. 중국 스스로가 서방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의 대중국 디커플링은 독일에게는 국익을 훼손하는 악재이다. 하지만, 독일은 미국이 주도하는 이런 조류에 휩쓸려 가고 있다. 독일-러시아 경제협력의 상징이었던 양국을 잇는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서 서방 쪽의 공작으로 파괴된 것이 밝혀졌지만, 독일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독일의 진정한 위기는 혁신을 위한 사회적 장치의 결여도 있지만, 지정학적 변화에 자신의 입지를 찾을 능력과 의지 부족에도 있다는 것을 독일은 지금도 애써 모른척 하고 있을뿐이다. 정의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