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고객사 개별수요에 특화된 맞춤형 메모리반도체 기술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존 메모리반도체 사업은 업황변동에 민감하지만 맞춤형 메모리는 가격과 공급 물량이 안정적이다. 이에 맞춤형 메모리 사업이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전체 실적에도 안정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맞춤형 메모리 반도체를 통해 실적안정성 개선에 나서고 있다. 곽노정 사장이 11월2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반도체 사업의 미래를 두고 강연을 하고 있다. < SK하이닉스 >
5일 SK하이닉스에 따르면 곽 사장은 차세대 메모리가 고객사의 요구에 따라 맞춤제작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관련 기술기반을 고도화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곽 사장은 최근 서울 고려대학교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고객별로 다양해지는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SK하이닉스만의 '시그니처 메모리'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곽 사장은 이어 “생성형 인공지능(AI) 시장은 앞으로도 급속도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런 흐름 속에 메모리 반도체 고객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최적화된 스펙의 메모리를 요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곽 사장의 이날 언급은 기존 범용 제품 중심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벗어나 고객사의 수요와 요구에 맞춰 제작되는 맞춤형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강화한다는 비전을 세운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곽 사장은 지난 10월 SK하이닉스 창립 40주년 행사에서도 “그동안 범용 제품으로 인식돼 왔던 메모리 반도체를 고객별로 차별화된 스페셜티 제품으로 혁신해 가겠다”고 말했다.
곽 사장은 이런 전략에 발맞춰 맞춤형 메모리를 뒷받침하는 기술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도화된 맞춤형 메모리를 제작할 수 있도록 메모리 내부에 연산 기능을 더하는 PIM(메모리내부연산)기술과 시스템 교체 없이 램 용량을 손쉽게 늘려주는 모듈화 인터페이스 CXL에 힘주고 있다.
PIM과 CXL 모두 메모리를 보다 다양한 형태로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맞춤형 메모리를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술로 꼽힌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2월 PIM이 적용된 메모리인 ‘GDDR6-AiM’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DDR5에 기반한 CXL 메모리의 개발소식을 전하는 등 맞춤형 메모리 관련 기술의 상용화를 목표로 속도를 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PIM과 CXL 기술을 더욱 고도화해 사업구조를 아예 맞춤형 메모리 중심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곽 사장은 창립 40주년 사내방송에서 “범용 제품 중심의 과거 방식을 벗어나 고객을 만족시키는 회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며 “메모리는 계속해서 고객의 요구에 맞춰 차별화돼야 하고 이것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곽 사장이 이처럼 맞춤형 메모리 중심으로 SK하이닉스의 체질을 전환한다면 우선 실적변동성을 낮추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맞춤형 메모리는 기존 제품과 달리 제조과정에서 고객사와 협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만큼 수요 예측이 쉽고 상대적으로 가격변동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는 기존 메모리산업이 갖는 불확실성에서 탈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범용 메모리 반도체는 시장수요에 따른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
특히 시장수요는 빠르게 변하는데 생산설비에 들어가는 고정비 비중은 매우 큰 만큼 메모리업체는 시장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SK하이닉스도 그동안 메모리 시장침체에 따른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 SK하이닉스의 PIM(메모리내부연산)기술이 적용된 메모리 ‘GDDR6-AiM’ < SK하이닉스 >
실제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감하자 지난해 4분기부터 대규모 적자를 이어오고 있다. 이에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에만 6조 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냈다. SK하이닉스의 부진은 IT수요 감소에 따라 DDR4를 비롯한 범용 메모리 수요가 부진한 영향에 따른 것이다.
다만 SK하이닉스는 사업부 전체 영업적자가 이어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D램사업은 올해 3분기에 영업이익을 내고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D램사업의 흑자전환은 맞춤형 메모리의 성격을 갖고 있는 HBM 시장의 가파른 성장세에 힘입은 것이다. 글로벌 HBM 시장은 2022년 23억 달러(약 3조원)에서 2025년 103억달러(약 13조 9천억원)로 연평균 64%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HBM은 D램으로 분류되지만 공정과정에서 높은 기술력을 요구한다는 점에 더해 AI서버용에 특화된 제품이라는 점에서 맞춤형 메모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곽 사장은 AI산업의 성숙에 따라 차세대 HBM이 더욱 본격적인 맞춤형 메모리 형태를 갖출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곽 사장은 2024년부터 양산될 예정인 HBM3E(5세대 HBM) 이후에는 초기단계부터 AI사업을 하는 고객과 긴밀한 협업 속에 메모리 스펙을 구성해야 하고 설계 및 생산 방식은 물론 마케팅 등 산업 전반에 큰 변화가 수반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HBM의 맞춤형 메모리화를 촉진하는 AI 산업의 변화는 점차 세분화되는 AI 서비스의 특징과 관련이 깊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빅테크 기업들의 AI 서비스는 회사별로 차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에 따라 AI 학습을 진행하는 방식도 제각각 달라지므로 회사마다 필요로 하는 메모리의 스펙도 다변화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증권업계에서는 HBM의 맞춤형 메모리화를 놓고 ‘메모리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파운드리는 통상 고객사로부터 시스템반도체 생산을 의뢰받았지만 맞춤형 메모리 요구 확산에 따라 메모리도 위탁생산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곽민정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HBM은 기존 범용 D램에서 벗어나 고객들이 원하는 위치에 맞춤형 AI서버 구현을 위한 스페셜티 D램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메모리의 파운드리화가 요구되고 있다”고 바라봤다. 김바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