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블리’ 우효광이 예능 프로에서 요리하는 남자로 돌아왔다. 어린이집에 가는 아들과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를 위해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전날 숙성해 둔 밀가루로 만두피를 밀고 국물을 내서 만둣국을 만들어 준다. 중국 남자는 스스럼없이 주방에 들어가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위해서 음식을 한다. <추자현 인스타그램 갈무리> |
[비즈니스포스트] ‘우블리’ 우효광이 예능 프로에서 요리하는 남자로 돌아왔다. 어린이집에 가는 아들과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를 위해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전날 숙성해 둔 밀가루로 만두피를 밀고 국물을 내서 만둣국을 만들어 준다.
얼마 전 한국문화와 중국문화의 차이에 관한 강연이 끝났을 때, 한 젊은 여성 청중이 물었다.
“왜 영화에서 아빠가 해 준 음식이 그립다고 해요?”
나도 주목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먼 훗날 우리’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남성이 여자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아빠 음식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고향이 생각나고 집 생각날 때면 엄마 음식이 그립다. 우리는 어렸을 때 엄마가 해 준 엄마 음식 맛에 길들고, 중독된다. 집 떠났을 때, 엄마가 떠나갔을 때 사무치게 그리운 게 엄마 음식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엄마표이다. 한국 사람은 대개 그렇다.
그러다보니 엄마 음식 맛 유전자를 지닌 한국인에게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해 준 음식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중국인은 낯설다. 그 젊은 여성 청중이 낯설어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 예능에서 가끔 중국인 시아버지, 아버지, 남편이 가족을 위해서 주방에서 음식을 하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낯설어한다.
그런데 중국 포털이나 동영상 서비스 같은 데서 중국인들은 중국 남자가 음식 하는 걸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한국 시청자 반응을 오히려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중국 네티즌들은 관련 한국 예능 동영상과 시청자 반응을 퍼서 나르면서 주방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요리하지 않는 한국 남성 문화, 가족문화를 신기해한다.
물론 요즘은 집에서 요리하고 주방일 하는 한국 남자도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래 여자가 해야 할 일인데 도와준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하다가도 자기 부모 앞에서는 아내를 대신해 음식을 만들거나 주방 일을 하지 않는다. 원래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렇다(이거 완전히 토종 한국인 유전자를 지닌 내 자신 얘기다!).
그런데 중국 남자는 한국 남자와 다르다.
중국 남자는 스스럼없이 주방에 들어가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위해서 음식을 한다. 남편이 음식을 할 때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쉰다. 퇴근하는 남편은 자연스럽게 시장이나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 온다.
명절에도 중국 여성은 음식 만드는 스트레스가 없다. 부부 가운데 먼저 퇴근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저녁을 준비한다.
물론 한국 남자라고 해서 다 요리하지 않는 것 아니고 중국 남자라고 하여 다 요리하는 것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보면 중국 남자들, 특히 한족 남자들이 한국 남자들보다 집에서 요리 잘한다.
한 중국 여론 조사에서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중국 대학생을 상대로 조사했는데 아빠 음식이 그리운 사람이 80%, 엄마 음식이 그리운 사람이 20%였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이 그리운 한국인, 아빠가 해 준 음식이 그리운 중국인,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문화적으로 보면, 한국 남자나 중국 남자나 다 공자 후손이다. 같은 유교 남자다. 그런데 어디서 차이가 난 것일까?
중국 남자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를 무시하고, 부엌일은 여성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통 시대는 물론이고 근대 시기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 남자와 같았다.
그런데 사회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달라졌다. 마오쩌둥 사회주의 시대를 두고 긍부정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남녀 관계 차원에서 보자면 마오쩌둥 사회주의 시대는 가부장 문화를 단절하고, 남녀 관계를 새롭게 세운 시대다.
무엇보다 여성에게 사회적 노동을 제공하는 한편 가사 노동, 육아 노동 부담을 줄였다.
밥도 공동 식당에서 먹거나 사다 먹어서 집에서 밥을 할 일이 없어졌다. 마오 시대에 지은 아파트에 주방이 손바닥만 한 것은 이런 때문이다. 탁아소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일하러 출근할 때 직장 탁아소에 맡기고 퇴근할 때 아이를 찾았다. 심지어 아이를 일주일 맡기는 시스템도 있었다.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는 것은 보장하지만 밥하고 아이 키우는 부담이 여전하다면 여성은 집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오 시대 중국은 여성의 가사와 육아 부담을 줄여주는 시스템을 마련하면서 여성 지위가 확연히 달라지는 계기를 맞았다.
여기에 집안에서 가부장인 남자의 경제권이 치명적으로 타격을 맞으면서 남녀 관계에 변화가 일어난다. 자녀의 결혼 같은 집안 중대사 결정권이 가부장 손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직장의 장에게로 넘어갔다.
노동 점수에 따라 집에 필요한 물자를 배분하고 돈을 줄 때도 집안 단위로 가부장에게 주는 게 아니라 집안 식구 수에 따라서 배분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코로나가 한창일 때 우리 정부가 코로나 생계 지원금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통장이 아니라 집안 가장 통장에 넣어 준 것을 떠올리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권력은 결국 경제권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마오쩌둥 시대에 가장이 지닌 경제권과 집안 의사 결정권이 해체됐고 이게 가부장제 해체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제도를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중국 경험이 말해준다. 하지만 제도를 바꾸는 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제도와 함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에 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영화 '엽문'에서 주인공 엽문이 구사하는 무술은 영춘권이다. 이 영춘권은 동작이 작아서 일부에서 여성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영화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엽문을 무시하는 한 무인이 ‘계집애들이나 하는 무술’이라고 비판한다. 더구나 아내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엽문을 두고서 공처가라고, 사내답지 않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러자 엽문이 말한다.
“세상에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자는 없다. 다만 아내를 존중하는 남자만 있을 뿐이다.”
영화 엽문에 나오는 명대사다.
여기서 남성적인 것에 관련한 고정관념이 순식간에 격파된다. 엽문은 무술의 고수만이 아니라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에 대한 고정관념도 깨는 고수이기도 하다.
엽문만 그런 게 아니라 아침에 가족을 위해 만두를 빚는 우블리도 그렇다.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을 두고서 이것은 남성적인 것이고 이건 여성적인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으면 엽문과 같은 생각은 불가능하다.
요리하는 중국 남자들 생각에는 아내를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요리하는 게 주방일을 하는 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나아가 그게 오히려 진정 남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남성과 중국 남성이 생각하는 남자다움의 차이다.
세상은 정치만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다. 정권은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보면 정치는 민주화되었지만 문화는 멀었다. 직장에서 갑질, 가정에서 가부장제는 여전하다. 문화는 여전히 봉건이다.
문화가 바뀌어야 세상이 비로소 온전히 바뀐 것이다. 문화는 그대로인 채로 정치만 바뀐 나라, 문화는 그대로인 채 정치만 민주화된 나라가 우리나라다.
문화를 바꾸려면 과감한 단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를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제도와 시스템을 먼저 바꾸고 생각이나 관념, 관습 같은 문화에서 옛것과 단절하는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다.
아침에 만두를 만들고 아이들이 아빠표 음식을 그리워하게 하는 우블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
현재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사범대학교 대학원 고급 진수과정을 수료했고 하버드대학교 페어뱅크 중국연구소 방문교수를 지냈다. 중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며 여러 권의 책을 냈고 jtbc '차이나는 클래스', EBS '내일을 여는 인문학'에 출연하는 등 대중과 소통에도 활발하게 나서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욱연의 중국 수업',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이만큼 가까운 중국',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 지성'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 '들풀', '광인일기',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아큐정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