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재 기자 piekielny@businesspost.co.kr2023-07-25 15: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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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서울 강남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국내 한 중소기업은 최근 5대 시중은행 중 한 곳으로부터 직원들의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계좌 이전 제안을 받았다.
다른 주거래은행이 있고 그 은행에 일괄적으로 직원들 퇴직연금 계좌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계좌 이전을 제안한 시중은행은 직원들의 퇴직연금 운용사 선택권을 넓혀줄 수 있다는 점, 경쟁사 대비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 상품 수익률이 높다는 점 등을 앞세워 계좌 이전을 설득했다.
▲ 디폴트옵션 제도 시행으로 시중은행의 퇴직연금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퇴직연금 계좌만 옮기더라도 직원에게는 급여이체 계좌를 보유한 것과 같은 우대 서비스를 제공하고 회사에는 대출금리를 깎아준다는 실질적 혜택도 제시했다.
이 중소기업은 결국 규약 변경을 통해 새 시중은행을 퇴직연금 운용사로 새로 추가한 뒤 직원들에게 이를 안내했고 몇몇 직원들을 실제 퇴직연금 계좌를 새 시중은행으로 옮겼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7월 디폴트옵션 제도의 본격적 시행 이후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쟁탈전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금융소비자가 직접 금융사를 선택하는 개인형퇴직연금(IRP) 상품 유치를 위한 마케팅 확대는 물론이고 위 사례처럼 시중은행 영업 담당자가 직접 기업을 찾아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을 유치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시중은행이 이처럼 퇴직연금 유치에 적극 나서는 것은 최근 디폴트옵션 제도의 본격 시행으로 퇴직연금을 향한 시장의 관심도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으면 사전에 지정해 놓은 방법으로 퇴직금을 자동으로 굴리는 제도로 1년의 유예기간을 마치고 12일 본격 시행됐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제도인 만큼 퇴사시 정해진 퇴직금이 나오는 확정급여형(DB)이 아닌 금융소비자가 직접 퇴직금을 운용하는 확정기여형과 개인형퇴직연금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다.
디폴트옵션 제도는 이제 막 시작된 만큼 성장성이 큰 분야로 여겨진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디폴트옵션 제도를 통한 운용자산 규모는 9766억 원으로 1조 원이 채 안 된다.
5대 시중은행이 2분기 말 기준으로 보유하고 있는 확정기여형과 개인형퇴직연금 자산 82조7763억 원의 1.2%에 그친다.
디폴트옵션 제도가 본격화하면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자금이 증권사 등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이른바 '머니무브' 우려도 나왔으나 아직까지 시중은행에서는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2분기 말까지는 5대 시중은행에 지속해서 돈이 몰리며 퇴직연금시장에서 은행권의 영향력이 더욱 단단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6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의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 개인형퇴직연금을 합친 퇴직연금 규모는 140조2638억 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6.1%(8조299억 원)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 금융권 전체 퇴직연금 규모는 331조7240억 원에서 345조8140억 원으로 4.2%(14조900억 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5대 시중은행이 전체 퇴직연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말 39.9%에서 상반기 말 40.6%로 0.7%포인트 증가했다.
5대 시중은행 퇴직연금 증가분을 상품별로 살펴보면 가장 덩치가 큰 확정급여형은 0.1% 줄어든 반면 개인형퇴직연금과 확정기여형은 각각 16.2%와 5.9% 증가했다.
시중은행 역시 머니무브 우려와 달리 고객이 직접 자금을 운용하며 수익성을 중시하는 개인형퇴직연금과 확정기여형 상품의 자금이 늘어난 것이다.
디폴트옵션 제도가 본격 시행되면서 고객 유치를 위한 5대 시중은행의 홍보전에도 불이 붙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지난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디폴트옵션을 비롯한 퇴직연금 관련 2분기 말 관련 자료를 공개한 뒤 서로 유리한 내용을 찾아 알리기 바쁜 모습을 보였다.
KB국민은행은 디폴트옵션 일부 상품이 수익률 1위인 점을 내세웠고 신한은행은 2분기 말 기준 디폴트옵션 운용 규모 1위를 강조했다.
▲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홍보전이 치열해지고 있다. 사진은 27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우리은행의 연금자산관리 세미나 포스터. <우리은행>
하나은행은 상반기 디폴트옵션을 포함한 퇴직연금 전체 증가율이 국내 금융사 가운데 가장 높다는 점을 성과로 알렸다.
우리은행은 퇴직연금 관련 별다른 보도자료는 내지 않았지만 27일 우리자산운용과 함께 퇴직연금 가입고객을 대상으로 온라인 연금자산관리 세미나를 연다.
디폴트옵션을 비롯한 5대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쟁탈전은 하반기 더욱 치열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5대 시중은행은 현재 디폴트옵션 상품을 각각 7개씩 운영하고 있는데 다수 은행이 하반기 중 이를 10개까지 늘릴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디폴트옵션 상품은 사업자별로 모두 10개까지 출시할 수 있다.
각 시중은행의 상품 증가는 소비자 선택권 확대로 이어지며 제도 안착에도 힘이 될 수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퇴직연금시장이 고령화와 국민연금 고갈 우려 등으로 지속해서 성장하는 상황에서 시중은행들은 지난해부터 디폴트옵션 제도 관련 사항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왔다”며 “은행뿐 아니라 증권사나 보험사도 퇴직연금시장 확대에 힘을 주고 있는 만큼 향후 퇴직연금시장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질 것이다”고 말했다. 이한재 기자